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여 Mar 27. 2022

12월에 펼쳐 본 조각보

일 년의 문을 닫는 12월에 찾아간 태안의 바다는 넘실대는 파도도, 은빛 고운 모래도 없었다. 단지 무심한 듯 끝없이 펼쳐진 갯벌뿐. 그래도 그 갯벌은 봄날의 나른한 햇살과 한여름의 폭풍우 그리고 익어가는 가을 내음을 품은 채로 자신만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았을 것이다. 그래서 ‘무(無)’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생명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 주는 자연의 보고인 ‘유(有)’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가 수많은 감정을 씨실과 날실로 엮으면서 일 년이라는 조각보를 만들었듯이. 그 조각보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헝겊 조각에 담긴 많은 이들의 에피소드를 듣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자소서 쓰다가 당이 떨어질 때마다 찾아간 편의점의 원 플러스 원에 중독되다 보니 한 겹이 더 늘어난 뱃살이 보내는 다이어트 신호를 늦게나마 받아들이겠다는 취준생, 층간 소음으로 괴로울 때면 위층 꼬마가 “내일부터는 조심조심 걸어 다닐게요, 죄송합니다.”란 메모와 함께 보낸 붉은 사과를 보면 소음 공해가 말끔히 사라진다는 아랫집 수험생 누나, 코로나로 요양원 면회를 가지 못하자 재미있게 편집한 가족사진첩을 할머니에게 보낸 외손녀, 집에 있는 자투리 천을 이어 붙여서 만든 이불을 손주가 세상에 나오면 선물 1호로 주고 싶은 새내기 할머니, 텃밭에서 키운 열무로 김치를 담가서 친정어머니의 말벗이 되어 준 노인정에 기부한 초보 농부 아주머니, 다자녀 주택 청약에 당첨되어서 아이들에게 공부방을 줄 수 있어 올해가 더욱 뜻깊은 다둥이 부부, 평소에 소통이 어려웠던 아들과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하며 부자의 정을 다시 회복한 에너자이저 부자, 아이를 늦게 찾아가도 늘 웃음으로 맞아주던 유치원 선생님에게 손 편지와 직접 담근 유자청으로 고마움을 전한 워킹맘, 뒤늦게 배운 목공 실력으로 도마를 만들어서 예비 신랑인 아들에게 선물한 페미니스트 아버지,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위해 딴 노인 요양보호사 자격증으로 일을 해보니 탁월한 선택이었다며 자신을 격려하는 긍정 마인드의 며느리, 평소에 일 중독자였는데 대기업을 그만두고 나와 “인생은 짬뽕이야!”라며 짬뽕집을 개업한 기러기 아빠, 신문 기사에 난 폐지를 가득 실은 할머니를 도와준 중학생들에게 따스한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구독자들, 일 년 동안 무사고로 전국 어디든 자신의 발이 되어준 애마에게 상으로 코팅제를 입혀 준 베스트 드라이버 아저씨, 독서와 국어, 역사와 수학 등 자신이 잘 하는 분야를 정해서 아이 친구들을 모아 함께 가르치던 엄마들이 서로에게 감사의 응원을 전하는 품앗이 공동체 교육모임까지. 갯벌이 들려주는 조각보 에피소드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하늘빛이 붉은빛을 띠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일몰 시간이 되었다. 고요한 갯벌을 깨우듯 붉게 떨어지는 해를 보면서 그동안 달려온 시간들을 돌아보니 내가 엮은 조각보이지만 비뚤어지거나 엉성한 조각, 너무 촘촘하게 이어서 귀퉁이가 우는 조각, 균형이 잘 맞아 반듯한 조각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올 한 해가 ‘아직도’나 ‘이만큼 밖에’로 아쉬움이 남든, ‘이만큼이나’로 보람되었든 우리에게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기에 그 추억을 품고 새해로 희망 여행을 떠나 보자.                    

이전 19화 아름다운 뒷모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