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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Dec 13. 2021

몬태나는 내게 희로애락락락

인생의 터닝 포인트

Enjoy the little things, one day you'll look back and realize they were big things.


몬태나는 내게 매우 특별하다. 그 이유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나의 첫 외국생활이자, 첫 이민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사십 평생을 한국에서만 살다가 불혹의 나이에 몬태나로 이사를 왔다.


喜(기쁠 희)


나는 한국의 조직 생활에 비교적 잘 적응한 교사 중 한 사람이었다. 학교에서도 연구부장, 윤리부장 또는 학교폭력 예방 담당교사 등을 오랫동안 맡아왔고 승진점수도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어릴 적부터 꿈이 선생님이었기에 꿈을 이루고자 열심히 공부했고 또 운이 따라주어 교대 졸업 후 바로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교직생활은 나에게 있어 꿈의 생활이었고 꿈을 이룬 후에는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하며 늘 꽃길만 걸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교직의 모습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료주의적이었고 승진 중심적이었다. 답답했던 내 마음은 나를 대학원 공부로 이끌었다. 박사과정 때 첫 소논문으로 학교조직에서 나타나는 관료주의적 특성에 대해 연구했고, '교사들이 왜 교장이 되려 하는가'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9년 만에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교직사회를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수업보다는 승진점수 관리, 공문처리 능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학교의 분위기는 종종 이해하기 힘들었고 쉽게 바뀌기 어려워 보였다.


남편이 몬태나로부터 연구원 제안을 받은 건 2016년 가을. 남편의 회사에 파견 제도가 있어 지원해 본 결과 한 군데에서 답장이 왔다. 회사에서 처음에는 허락을 해 준다고 했지만 막상 가고자 하니 결재를 미루며 안 될 거 같다 태도를 바꾸었다. 몬태나로 이사하려면 남편은 잘 다니던 회사 생활을 그만두어야 했다. 남편은 팀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기에 주변 동료들은 하나같이 가지 말라며 만류했다. 남편도 갈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가보고 싶었다. 몬태나로 가면 왠지 기쁜 일만 가득할 것 같았다. 그래서 무조건 가자고 남편을 설득했고 우리 가족은 2017년 초, 몬태나로 떠났다.


怒(성낼 노)와 哀(슬플 애)


몬태나로 이사를 오면 그동안 답답했던 내 마음이 시원하게 뚫릴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더 답답해졌다. 한국이 완벽할 수 없고 교직사회가 완벽할 수 없듯이, 미국도 몬태나의 생활도 완벽할 수 없었다. 처음에 이사를 와서는 여러 가지 불편하고 힘들고 때론 황당하기도 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눈길 운전이 위험천만해서, 영어가 너무 안돼서 등등. 맞벌이였던 우리 가족의 연봉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작은 월급 중 많은 부분은 월세와 공과금, 식비로 지출이 됐다. 사는 집의 크기도 절반 이하로 줄었고 주변에는 친한 친구, 친척도 한 명 있을 리가 없었다.


똘똘이의 나이는 네 살, 나와 남편은 마흔을 넘긴 나이.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아들은 너무 어린것 같았고 우리 부부는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어린이집을 처음 다니게 된 똘똘이는 한 달 이상을 울며불며 눈물, 콧물 흘리며 등원을 했다. 어린아이도 낯선 곳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교사로서 전문성을 쌓아갔던 나는 몬태나에 와서는 그저 홈맘, 영어도 제대로 안 되는 외국인이라는 생각에 시도 때도 없이 답답함이 밀려왔다. 이런 감정은 나를 때론 화나게도 하고 때론 눈물이 또르르 날 정도로 슬프게도 만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첫 몇 달간 꿈을 꾸었다 하면 학교에서 있는 내 모습이 나왔다. 한국에서 나의 생활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학창 시절에 늘 학교생활한 것은 당연했고 교사가 된 이후에도 하루 8시간 이상 학교 근무 후 다시 공부하러 또는 수업하러 대학교로 향했다. 하루 24시간 중 절반 이상은 학교에서 생활했다. 그랬던 내가 집에서만 있자니 너무 어색했고 그렇다고 나갈 데도 없었다. 남편을 설득해서 이곳으로 왔기에 겉으로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처음 몇 달 간은 수시로 그렇게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런 내 모습은 힘든 나를 더 힘들게 했다.   


樂(즐거울 락)


사십이 넘어 시작한 우리 가족의 첫 이민생활, 몬태나 생활은 혹독하게 나를 사춘기 아니, 사십춘기로 이끌었다. 그러나 나는 점점 깨닫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한국의 기준이 있었듯이, 미국에는 미국의 기준이 있었다. 나이라는 꼬리표는 미국 생활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사십 대에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운동과 취미에 도전하는 미국 친구들,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서도 매일 감사하는 생활을 실천하는 다문화 친구들,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과 어릴 적 입양된(또는 한국 아이를 입양한) 엄마들을 만나면서 나는 점점 나만의 감정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하루하루 도전하고 즐겁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주변 한국 분들 중에서 무려 사십이란 나이에 한국을 떠나 멀리 몬태나까지 온 사람은 없었다. 미국에 오길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굳이 여기까지 왜 왔어?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랬다. 무엇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을까! 사십이 넘어 외국생활도 처음이고, 이민생활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을 해 보니 나는 무려 사십 년이나 한국에서 살았다. 나보다 한국을 잘 아는 사람, 한국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그 자체가 나만의 장점이자 전문성이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임을 한동안 잊고 있었다. 한 번뿐인 인생, 인생의 전반전인 사십 년을 한국에서 살았으니 인생의 후반전은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는 것도 얼마나 큰 복인가! 생각의 전환을 하고 나니 진정 새로운 삶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선물처럼 주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며 멋진 자연과 함께 한 즐거움, 새롭게 사귄 여러 인종과 국적의 친구들과 함께 한 즐거움, 한국의 문화를 알고 싶어 하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 엄마들과 함께 한 즐거움. 되돌아보니 나의 새로운 삶은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이 참 많았다.



흔히들 인생은 희로애락이라고 한다. 사람의 여러 가지 감정을 이르는 말로 보통 인생사(人生事)를 이야기할 때 많이 쓴다. 한국에서도 미국 몬태나에서도 똑같았다. 내 인생은 희로애락이었다. 하지만 사는 장소가 바뀌고 함께하는 사람이 달라지면 그 경험의 질도 양도 달라지듯 그동안의 모든 경험은 한국에서 느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우리 가족은 돈 부자와는 조금 멀어졌지만 돈으로는 살 수도, 따질 수도 없는 경험 부자, 마음 부자가 되었다.


한국에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희로애락을 새로운 곳에서 만났고 지금도 계속 만나며 생활하고 있다. 인생의 희로애락 중에서 마지막 단어인 '락'을 더 많이 찾고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하루하루 소중하게 의미 있게 즐겁게 생활하며 사자성어 희로애락 중에서 마지막 단어를 조금 더 늘려서 여섯 글자 '희로애락락락'의 삶으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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