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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May 20. 2021

몬태나에서 실컷 멍 때렸다.

산멍, 물멍, 불멍

Today I will do absolutely nothing. It's ok to do nothing.


몬태나로 이사를 와서 가장 어색했던 것은 낯선 환경도 아니었고 영어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어색했던 것은 사십 평생을 늘 공부하며 일하며 바쁘게 살아온 나의 관성을 바꾸는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시간이 아까웠다. 하고 있는 하나의 일이 끝나면 그다음 일을 해야 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늘 성적으로 비교되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다.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에는 열심히 임용 준비해서 졸업 후 선생님이 되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다. 교사가 된 후에는 학교 일에 더해서 대학원 공부를 하느라 바빴다. 교육 정책에 대한 실망감, 과열 승진 경쟁에 대한 회의감으로 선택한 대학원 공부는 장장 9년이나 이어졌다. 낮에는 학교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대학원으로 향했다.


대학원 졸업 이후에 해야 할 일은 더 많아졌다. 경쟁 사회 속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야 오히려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남과의 약속, 과제 기한, 출장 스케줄이 우선할 때가 많았다. 한 번은 주말에 서울로 출장을 갔다가 제공된 도시락을 먹고 그 날 저녁 엄청나게 토를 했다. 더운 여름날이었는데 아마도 도시락 반찬이 상한 것 같았다. 어쩐지 반찬 맛이 조금 다르다 했는데, 아차 싶었다. 그 이후로 6개월간 식도염으로 고생을 했다.


몬태나에 와서도 관성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 이제 좀 쉬자! 여유롭게 몬태나 생활을 해 보자.' 마음속으로 외쳤지만 직장을 관두고 몬태나까지 온 남편은 열심히 일을 했고, 나도 자원봉사, 재능기부 등 할 일을 찾고 또 찾았다. 한국에서의 관성을 못 버리고 열심히 살고 바쁘게 지냈어도 한국 사회에서 느끼던 열심, 바쁨의 개념과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이곳에선 야근을 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고 주말 근무를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퇴근 후에는 직장 사람들과 회식하는 문화가 없었고 윗사람을 웃어른으로 모시며 잘 보여야 하는 문화도 없었다. 상사의 이름을 친구와 똑같이 그냥 부르며 위아래 구분 없이 자유롭게 대화를 했다. 주말에는 다들 가족과 함께 여유롭게 지내고 캠핑, 하이킹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초등학교의 하교시간은 3시 전후였는데, 많은 학부모들이 같이 아이를 찾고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기도 했다. 똘똘이와 같은 반 친구인 딜런의 엄마는 캘리였는데 몬태나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을 했다. 캘리는 정규직이었지만 한 번도 빠짐없이 매일 2시 50분에 퇴근을 하고 아이를 찾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많이 다른 직장 환경을 느낄 수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나 아빠들도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속담처럼 놀아 본 사람이 잘 놀 수 있는 법. 그냥 여유롭게 가족과 함께 뒹굴거리고 아무 목적 없이 친구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우린 연습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노력했다. 친구들이 차 한잔 하자, 근처 산에 같이 가자고 하면 냉큼 채비를 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을 빼곤 주말마다 캠핑이든 하이킹이든 어디로든 나섰다.


멍 때리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다.'
라는 뜻의 형용사 ‘멍하다’로 부터 나온 신조어

이곳저곳 캠핑 다니고 하이킹 다니며 가장 많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대화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사진도 많이 찍었지만 가장 많이 한 일은 아마도 아무 생각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자연을 바라보고 모닥불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 일이 아니었을까. 한국에서는 멍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참 아까운 시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건 완전히 착각이었다.  


산을 바라보는 '산멍'


몬태나에는 산이 정말 많다. 어딜 가도 산이 보이고 운전 중에도 차창 넘어 산이 펼쳐진다. 심지어 동네 마트 주차장에서도 저 멀리 풍경화처럼 산이 보이는 곳이다. 몬태나는 로키 산맥의 위에 있는 주로 해발 평균 1000m를 자랑한다. 보즈만은 500m 더 높아서 해발 1500m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고도가 높다는 것은 하늘이 가깝고 산도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몬태나주의 대표적인 별명은 보물 주(Treasure state), 큰 하늘 지역(Big Sky Country)이다.


하이킹을 가거나 캠핑을 가면 산의 초록 초록한 풍경 또는 눈 쌓인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몬태나의 많은 관광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옐로스톤과 글래이셔 국립공원. 옐로스톤은 3%만 몬태나에 속해 있지만 몬태나 보즈만에서 약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기에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다. 국립공원에도 역시 산이 많지만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산들과 다른 점은 야생동물이 시시때때로 인사를 한다는 점이다.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야생동물들을 만나면 참 반가웠다.


(좌) 몬태나에선 운전 중에도 가끔 산멍, (중) 산 중턱에서 M자를 발견하면 왠지 반갑다. (우) 보즈만 M 트레일은 멋진 산
몬태나 최고의 산멍 장소는 옐로스톤(좌), 글래이셔(우) 국립공원, 산을 보다가 종종 야생 동물이 나타나 인사를 한다.

물을 바라보는 '물멍'


몬태나 보즈만에는 산도 많지만 물도 많다. 동네에도 크고 작은 연못과 호수들이 있고 산 꼭대기에도 예쁜 호수들이 많이 있다. 어릴 적 물에 빠진 이후로 물을 무서워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과 아들은 수영도 잘하고 물놀이를 좋아한다. 나는 물에 직접 들어가는 것보다는 물을 바라보는 '물멍'이면 대만족이다.


보즈만 시내에는 몬태나주립대학교에서 5~15분이면 갈 수 있는 보즈만 연못, 보즈만 비치가 있어서 물놀이나 낚시를 쉽게 즐길 수 있다. 20분쯤 차를 타고 가면 벨그레이드라는 동네에 리버락 연못이 있는데 이곳은 좀 더 크다. 카누를 타거나 수영을 하는 장소로 좋다. 몬태나에서 가 본 곳 중에서 최고의 물멍 장소는 역시 플랫헤드 호수. 깨끗하고 투명한 호수의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보즈만에는 호수, 연못, 강 등 가까운 곳에 물이 많다. (좌, 중) 보즈만 연못, (우) 벨그레이드 리버락 연못
몬태나 보즈만 비치(좌)는 작지만 예쁜 호수, 플랫헤드 호수(우)는 몬태나 최고의 호수 중 하나

모닥불을 바라보는 '불멍'


한국에서 사는 동안 캠핑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왠지 주말에도 마음이 바빴고, 시간이 나도 캠핑보다는 호텔을 가거나 펜션을 다니는 것에 만족했다. 캠핑은 시간이 더 많고 여유로운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캠핑 장비를 모두 장만해서 챙기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몬태나에서 처음 해 본 캠핑은 신세계였다. 캠핑 장비만 갖춰 놓으면 캠프 사이트를 예약하거나 이동하는 데에는 큰돈이 들지 않았다. 보즈만에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만 가도 산과 물이 있는 캠핑장을 찾을 수 있었다. 캠핑 장비는 모두 야드세일(Yard Sale) 또는 거라지세일(Garage Sale)에서 싸게 살 수 있었다. 미국에서 흔한 이 두 가지 세일 방식은 개인이 더 이상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을 집 마당 혹은 차고에 펼쳐놓고 파는 것을 말한다.


캠핑을 가면 산멍도 좋고, 물멍도 좋지만 무엇보다 불멍이 최고였다. 똘똘이는 항상 긴 나무 막대 하나 들고 불 지킴이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찔러가며 살뜰하게 모닥불을 돌보곤 했다. 모닥불이 어느 정도 타오르면 우리들은 종종 스모어를 만들어 먹었다. 미국 와서 처음 먹어 본 스모어는 너무 달았다. 하지만 나무 꼬챙이에 마시멜로우를 꽂아서 굽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스모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마시멜로우를 살짝 갈색 빛이 돌도록 구워야 한다. 이후 두 개의 그레이엄 크래커 사이에 구운 마시멜로와 초콜릿을 끼워 넣으면 된다.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쉽게 만들어진다. 스모어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즐겨먹는 캠핑 음식으로 'some more(조금 더)'가 변형된 'S'mor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너무 맛있다 보니 먹는 사람마다 더 달라고 해서 이렇게 지어졌단다. 작명 센스가 좋다. 설탕이 듬뿍 담긴 스모어는 식후에 한 두 개 정도만 먹어도 충분했다.


캠핑장에서 저녁엔 주로 장작불을 지피며 불멍 때리며 시간 보내기

몬태나에서 실컷 멍 때리면서 느꼈다. 한 박자 천천히 가고 멍 때리며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멍 때리면서 배웠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돈보다는 사람이 주는 행복이 더 컸다. 일보다는 관계가 주는 행복이 더 마음에 남았다. 앞으로 나는 가족들과 함께 멍 때리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 더욱더 많이 갖고 싶다.


열심히 치열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도 가치롭고 성취감을 주는 괜찮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았다. 아주 괜찮았다. 



[참고 자료]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20/10/23/20201023021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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