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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May 30. 2021

처음으로 만난 몬태나 엄마들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진 엄마

Mother's love is the most unconditional and the purest form of love.


한국에서 18년이라는 짧지 않은 교직 생활을 하면서 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을 만났다. 12 학급의 작은 소규모 학교에서부터 48 학급의 대규모 학교까지 다양한 학교를 경험했고 다양한 엄마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육열이 대단했던 엄마부터 자녀 교육에 아주 무관심했던 엄마까지, 외국 사람이어서 어려움이 많았던 엄마, 외국 사람이지만 한국어를 한국 사람처럼 잘했던 엄마, 마음이 아파서 약을 먹고 있었던 엄마 등등


몬태나로 이사를 와서 살면서부터는 엄마로서 학부모로서 다양한 엄마들을 만나고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자녀끼리 잘 어울리고 같이 잘 논다면 엄마와도 함께 친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녀의 교우 관계가 엄마의 교우관계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여기에서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나름 다양한 엄마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몬태나에 오니 그동안 한 번도 못 만나 봤던 그런 엄마들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엄마들은 입양이 된 엄마, 그리고 입양을 한 엄마들이었다. 한국에서는 입양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 어릴 적 입양이 된 엄마나 입양을 한 엄마를 가까이에서 접해 볼 기회는 없었다. 미디어를 통해서나 아는 분을 통해서 입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몬태나에 오니 입양은 더 이상 먼 단어가 아니었다.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고 이제 엄마가 된 분들, 입양 아동을 맞이해서 키우고 있는 엄마들이 내 주변 가까이에 있었다.  


입양이 된 엄마


한국전쟁 직후부터 현재까지 20만 명의 한국 어린이가 다른 나라들에 입양됐다. 그 가운데 11만 명이 넘는 어린이가 미국으로 향했다. 1995년까지 한국은 미국에 어린이를 가장 많이 입양 보내는 나라였다. 40~50여 년 전 한국에서 미국으로 많은 입양아들이 유입이 되었을 당시, 몬태나주는 한국 입양아들이 많이 배정이 되는 지역 중 한 곳이었다. 몬태나에는 지금까지도 입양 에이전시가 운영이 되고 있고 보즈만에도 예전에 에이전시가 있었기 때문에 입양 아동들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분의 소개로 알게 된 에밀리는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으신 분이었고 아들 하나를 두고 계셨다. 아주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기에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한국어도 할 줄 모르셨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한국에 가 본 적도 없지만 한국에 대한 그리움, 한국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 분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남편분은 미국 사람이셨고 아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는데 요즘 아들이 한국 노래에 관심을 보인다며 빙그레 웃으시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에밀리께서는 ELK 한국 클럽의 개강 모임에도 오셨었다. 바로 내 옆에 앉으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직도 한국에 대한 생각을 하면 한쪽 마음이 허전한 것 같다고 하셨다. 한글로 '에밀리' 이름을 써달라 해서 쪽지에 써서 드리니 너무 감사하다며 고이 접어 지갑에 넣으셨다. 그동안 부모님이 누군지 안다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하지 않았다. 태어난 곳도 한국, 외모도 한국 사람, 핏줄도 한국인이지만 어릴 적 입양이 되어 미국인으로서 오십 넘게 평생을 살아오신 엄마. 그분의 마음 한 편에는 여전히 한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입양을 한 엄마


아이를 입양한 엄마도 내 주변에 세 명이나 있었다. 나와 친한 미국 친구 제니퍼는 결혼 후 입양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인터넷으로 입양 아동에 대한 검색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너무도 눈길이 가는 한 아이를 발견했고 찾아보니 한국에 있는 3살 아이였다. 그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긴 심사 절차를 거쳤고 부부 모두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을 하여 아이를 데리고 왔다. 이제 미국인이 된 아들이지만 제니퍼는 아들에게 한국어 공부를 꾸준히 시키고 있다. 더불어 제니퍼도 올해 처음으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에 온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어를 기억하고 있는 아들과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싶어서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입양을 한 친구는 또 있었다. 많은 한국분들과 친했던 메리였다. 메리는 조금 더 특별했다. 본인도 어릴 적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이 된 엄마이면서 결혼 후 입양을 두 명이나 한 엄마이기도 했다. 미국인 남편과 결혼하셔서 아들만 둘을 낳은 후 딸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두 명의 아기를 아프리카에서 입양하셨다. 지금은 많이 커서 초등부터 고등까지 모두 네 명의 자녀를 키우고 계다. 메리도 한국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지만 한국 요리를 즐겨하시고 한국에 대한 관심도 많다. 또한, 자녀들에게 한글 공부를 시키고자 꾸준히 노력을 하는 엄마다. 큰 아들인 제임스는 나중에 한국에 꼭 가고 싶어 하며 요즘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초등학교 방과 후에 스몰토크를 하면서 알게 된 미국 친구 캐시도 중국에서 아이를 입양한 엄마였다. 딸 자녀를 두고 있었지만 아들도 있었으면 해서 한 명을 입양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똘똘이와 같은 피부색, 비슷한 키를 가진 캐시 아들은 도서관이나 가족행사에 가면 내 눈에 잘 띄었다. 입양을 해서 키우는 일이 궁금하다, 어떠냐는 한 친구의 질문에 살짝 미소를 띠며 "You know, it's a journey."라고 대답을 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journey는 여행 중에서도 아주 긴 여행,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여행을 의미한다.  


홈스쿨링을 하는 엄마


우리 집 대각선 방향에서 살았던 애슐리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엄마였다. 남편은 몬태나주립대 대학원생이었고 애슐리는 우리 동네 커뮤니티 직원으로 활동했다. 애슐리의 아이들은 모두 똘똘이와 나이가 비슷했고 집도 가까워서 우리들은 서로 왕래하며 가깝게 지냈다. 똘똘이는 매일 학교를 다녔지만 애슐리네 아이 두 명은 집에 있으며 낮에 어디론가 다녀오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애슐리는 자녀 두 명 모두 홈스쿨링을 시키고 있었다.


몬태나에서 홈스쿨링을 하는 가정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제니퍼도 홈스쿨링을 하는 엄마였다. 제니퍼는 이십 대 때 미국으로 와서 박사 취득 후 연구원 생활까지 했지만 연구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은 초등학교 나이인 세 자녀 모두 홈스쿨링을 시키며 매일 바쁘게 지내고 있는 친구이다. 학교를 안 보내고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 하며 어떤 방법으로 홈스쿨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애슐리, 제니퍼와 친하게 되면서 무슨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홈스쿨링을 하는지 물어볼 수 있었다. 대답은 명확했다. 공교육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고 욕설을 배울 수도 있으며 교사와 교육 내용에 대한 믿음도 높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홈스쿨링을 시키는 엄마들을 직접 만나 보지 못했다. 한국의 홈스쿨링 비율은 아주 적으며 거의 대부분의 가정이 학교를 보내고 있다. 그동안 홈스쿨링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집에서 엄마 또는 아빠와 같이 공부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몬태나의 홈스쿨링은 집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회에서 홈스쿨링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여러 비영리 단체에서도 홈스쿨링 수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홈스쿨링 온라인 사이트에서도 각종 수업 내용, 활동 자료 등을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있어서 홈스쿨링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미국의 홈스쿨링은 수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2019년 팬데믹 전까지 미국에는 약 250만 명의 홈스쿨 학생이 있었다. 수치는 팬데믹 이후로 급격히 증가해서 2021년이 되면서 450~500만으로 추산이 되고 되고 있다. 이는 학령 아동의 약 8~9%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홈스쿨링은 대안 교육으로 인식이 되었지만 이제는 미국의 주류 교육 중 하나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교육 형태가 되었다.   



미국 사람이지만 한국 사람인 엄마


몬태나에서는 만난 엄마들 중에는 미국 사람이지만 한 사람인 엄마도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릴 적 한국인 엄마 아빠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자란 HK가 있었고, 미국으로 이민을 온 한국인 엄마 아빠 가정에서 태어나고 계속 미국에서만 자란 헬렌이 있었다. 이 두 분은 모두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있지만 모국어로 영어를 쓰며 미국인으로서 거의 평생을 살아오신 엄마였다.


다섯 살까지 한국에서 살다 미국으로 이민을 오신 HK는 한국어를 거의 다 잊어버리셨다. 엄마, 아빠, 좋아 등 약간만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부모님 모두 한국 사람이시지미국 이민 후에는 집에서도 늘 영어만 사용하며 자랐다고 했다. HK의 외동아들인 토마스는 똘똘이와 같은 반 친구였기에 우리들은 가끔 놀이 모임을 가지며 잘 어울렸다. HK께서는 다섯 살 이후 영어만 쓰며 미국인으로서 살아오셨다. 하지만 아들을 낳고 키우면서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고, 한국에 대한 그리움도 생겨났다고 말했다. 나와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몇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이 한국어 공부를 하기도 했고 토마스에게 한글 수업도 받게 했다. 점점 한국에 대한 관심을 늘려 나가고 있는 분이다.


헬렌은 나와 동갑인 친구이다. 미국의 대도시인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다가 재작년에 보즈만으로 이사를 왔다. 미국에서 태어났고 계속 미국에서만 살고 있는 헬렌이지만 한국사람이 많은 LA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고 한국 친구도 많았다. 다녔던 LA 초등학교에는 심지어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보다 많았다고 한다. 한국어를 어느 정도 잘했기에 우리 둘이 만나면 늘 한국어를 썼다. 하지만 헬렌의 모국어는 영어, 영어로 말을 할 때 더 자신감 있고 편안해하는 모습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초등학생 아들을 둔 헬렌 한국 음식을 정말 좋아했다. 포트럭 모임을 했을 때 내가 만들어 가지고 간 약밥을 먹으며 너무 행복해하던 표정이 선하다. 두 아들에게 계속 한국 문화를 알려주고 싶어 하는 마음도 컸다.


한국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여러 학교를 두루 경험했고 다양한 학부모님들, 어머님들을 만나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몬태나에 와서 생활을 해 보니 이곳에는 또 다른 엄마들이 있었다. 입양이 된 엄마, 입양을 한 엄마, 홈스쿨링을 하는 엄마, 미국 사람이지만 한국 사람인 엄마 등 다양한 엄마들이 계셨다. 한국에서는 못 만나 봤던, 보기 힘들었던 엄마들을 몬태나에서 만났지만 우리들은 모두 엄마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다른 엄마들이지만 엄마이기에 강하고 따뜻하고 자식 사랑이 깊었다. 낳은 자식, 입양 자식 구별 없이 내 자식을 품어주는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처음으로 만난 몬태나 엄마들이었지만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우리들은 모두 엄마로 불린다. 살아온 배경, 살아가는 환경,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진 엄마다.



[참고 자료]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96997.html

https://www.nheri.org/research-facts-on-homeschoo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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