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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Feb 11. 2021

몬태나에서 빵을 굽게 된 계기

친구야, 고맙다!

Happiness is a surprise visit from friends.      


몬태나로 이사를 온 지 두어 달쯤 지나고 여느 때와 같이 오후에 빨래를 하고 빨랫줄에 널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다. 5월 초, 햇살이 참 좋았다. 아들도 나를 따라 나와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빨래를 다 널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혹시...”하면서 한국말이 들렸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어린 쌍둥이 아들 둘과 함께 나를 찾아온 내 또래의 한국 여성분. 집으로 가다가 나와 아들이 주고받는 한국말을 듣고는 지나가는 길에 물어보았단다. 우리집과는 걸어서 10분 떨어진 캠퍼스 주택에 산다고 했다. 우리 말고도 교직원 주택에 사는 한국사람이 더 있었다니! 너무 반가웠다.


쌍둥이네 아빠는 중국사람으로 MSU에서 연구원으로 일을 했다. 쌍둥이들 나이도 우리 아들보다 한 살이 어렸고, 쌍둥이 엄마도 나보다 한 살 어린 분. 알고 보니 쌍둥이들도 우리 아들과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다. 아들 또래 친구가 없어서 늘 나 혼자 놀아주는 것이 버겁다고 느낄 때쯤 마치 하늘에서 우리 가족에게 보내 준 친구들 같았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는 내일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다음 날 쌍둥이네를 서로의 집 중간에 있는 놀이터에서 다시 만났다. 캠퍼스 주택 단지 안에는 넓은 잔디밭과 놀이터가 군데군데 있어서 바깥으로 나가지 않아도 아이들과 놀기에는 참 좋은 공간이 많았다. 우리 가족은 해외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갓 두 달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쌍둥이네는 10년 넘게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로부터 우리들은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아이들의 나이가 맞고 사는 곳도 10분 거리라 만나기가 참 쉬웠다. 처음에는 캠퍼스 놀이터에서 주로 만나다가 어린이 박물관에도 같이 가고 공원 나들이도 함께 했다. 나와 아들의 나이가 모두 잘 맞는 또래를 찾기란 한국에서도 쉽지 않았다. 한국의 내 친구들 대부분은 자녀가 초등생 이상이었고, 어린이집 엄마들은 다들 나보다 어렸다. 그런데 몬태나 보즈만에서, 그것도 캠퍼스 내에서 서로의 나이와 함께 할 시간이 모두 잘 맞는 친구를 만날 수 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다.



주말 어느 저녁, “똑! 똑!” 누군가 우리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생각하며 문을 열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아니 고개를 숙이니 쌍둥이 두 명이 긴팔 상의에 바지 없이 기저귀만 차고 나란히 서 있는 것이었다. “Play! 놀아, 놀아." 중얼거리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우리 아들이 안에 있나 없나 요리조리 살피고 있었다. 설마 엄마 없이 너희들만 왔냐고 물으니 대답을 안 한다. “아이고, 둘이서 여기까지 온 거니?” 하니 눈을 피하며 내 옆을 쌩 지나 안으로 들어가서 아들과 손을 잡았다. 순식간에 세 명의 아이들은 “Let’s play!”를 외치며 둥그렇게 손을 잡고 있었다.


귀여운 행동에 웃음이 나는 것도 잠시, 얼른 쌍둥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부엌일 하는 사이 아이들이 사라진 걸 방금 전 알았다며, 십 년 감수했다고 했다. 얼른 우리집으로 온다고 했지만 날씨가 따뜻해서 우리들도 걸어서 같이 쌍둥이네로 향했다. 5분쯤 걸었을 무렵 중간 지점인 놀이터에서 다 같이 만났다. 쌍둥이 두 아이들은 엄마를 보자 “놀아요!”라고 합창을 했다. 우리 아들도 “엄마, 놀고 싶어요!” 간절한 눈빛을 발사했다. 그 후 우리는 1시간 가까이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내일 또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쌍둥이 엄마는 참 재주가 많았다. 특히, 제과 제빵! 한국에서 중학생 시절부터 집에서 쿠키나 빵을 혼자 만들어 먹었다고 했다. 플레이 데이트를 할 때마다 집에서 구운 쿠키와 머핀 등을 챙겨올 때가 많았다. 한국에서 빵과 떡을 참 좋아했었던 나로선 너무 호기심이 생겼다. 미국에서 빵의 개념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간식이라기보다는 주로 식사용이라고 한다. 그래서 빵을 사러 가면 식빵, 베이글 등이 많았고 그 외 다양한 케이크나 쿠키 종류들이 있었지만 왠지 한국빵보다는 너무 달았다.


어느 날, 쌍둥이 엄마가 소보로빵을 구웠다며 한 봉지를 가져다주었다. 몬태나에서 처음으로 먹어 본 한국빵! 입에서 살살 녹았다. 우리만 먹기에는 아까워서 2개를 따로 포장을 해서 한인회장님께도 가져다 드렸더니 깜짝 놀라신다. 이 귀한 빵이 어디서!


한국에서 있는 동안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외식이 잦았고, 김치는 늘 친정엄마께서 만들어 주셨었다. 오븐도 없었기에 빵을 집에서 만들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해봤다. 지금 몬태나의 우리집에는 오븐이 있었지만 사용할 엄두가 안 났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빵집과 떡집을 찾았던 나로서는 오븐을 이용해서 빵을 만들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어 물었더니 해 보면 별 거 아니라며 당장 내일 집으로 오라고 했다.


들뜬 마음으로 아침 일찍 쌍둥이네로 향했다. 빵을 만들려면 일단 반죽을 해야 했다. 손반죽도 가능했지만 빵기계가 있어서 아주 쉬웠다. 하얀 앙금도 리마빈(우리나라 작두콩과 비슷)을 사서 만들었다면서 꺼내 놓았다. 보즈만에는 한국 마트가 없어서 단팥을 사기 어렵지만 리마빈은 쉽게 구할 수 있어 불려서 껍질을 까고 설탕에 조려 만들었다고 했다. 앙금을 콩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빵기계에 우유와 물, 이스트를 먼저 넣었다. 여기에 밀가루, 계란, 설탕, 소금, 버터를 넣고 도우 기능으로 돌린 지 1시간 반이 지나자 1차 발효가 끝난 반죽이 완성되었다. 반죽을 꺼내서 작은 크기로 나눈 후 잠시 쉬게 했다가 모양을 만들었다. 고슬 고슬 소보로 가루를 만들어 묻히고, 앙금도 넣은 후 2차 발효에 들어갔다. 1시간이 더 지나자 빵이 몽실몽실 예쁘게 부풀었다. 오븐에 들어가서 15분을 굽자, 짠! 하고 빵집 비주얼을 뽐내는 소보로빵과 단팥빵이 구워져 나왔다.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역시 빵은 갓 구운 빵이었다.


실력 없는 목수가 연장 탓을 한다지만 내게는 빵을 굽는 도구들이 전혀 없었다. 그런 내게 쌍둥이 엄마는 여러 베이킹 도구들을 챙겨주며 우유, 계란은 집에 있을 테니,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만 사서 쉬운 머핀부터 만들어 보라고 했다. 종종 여러 가지 빵 레시피와 사이트를 알려주며 “오늘 이거 어때요? 해 보면 쉬워요.” 문자를 보내주었다.


빌려 준 여러 도구들이 있으니 호기심에 이것저것 만들어 보게 되었다. 막상 해 보니 크게 어려울 것도 없었다. 내겐 없을 것만 같았던 요리 실력이 점점 늘어갔다. 유튜브로는 영어 공부하고 뉴스만 보다가 점점 요리 채널에 방문하게 되었다. 노하우(know-how) 시대가 아닌 노웨어(know-where) 시대임을 실감했다. 오븐은 내게 먼 당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반죽을 넣고 돌리면 마치 마법을 부리 듯 맛있는 빵이 구워져 나왔다. 


쉬운 머핀에서부터 시작해서 쿠키, 빵, 케이크 등등. 기존 레시피에서 설탕을 줄이는 대신 견과류와 건과일, 꿀 등을 넣으니 건강에 조금 더 좋은 빵이 탄생을 했다. 빵기계도 빌려 준 덕분에 혼자 소보로빵에도 도전을 했는데 그 결과는 대성공. 매번 빵을 구울 때마다 나의 뱃살은 늘어갔지만 주변 분들과 나눠먹는 재미에 더해, 엄마가 최고 요리사라며 엄지 척! 하는 아들을 볼 때마다 신이 났다. 더 이상 마트에서 빵과 쿠키는 사 먹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쌍둥이네와 만난 시간들이 두어 달쯤 되었을 때, 갑자기 곧 이사를 가게 될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이 중국의 한 대학에서 직장을 다시 잡게 될 거 같다고 하면서. 만난 지 불과 2개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곧 떠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웠다.


이사 갈 날이 다가 오자, 쌍둥이 엄마가 내게 물었다. 쌍둥이네 집에 있는 가구들과 주방 살림들을 원하면 모두 주고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사 온 지 4개월 정도 되었었던 우리는 그 당시 세탁기, 침대, 소파, 식탁과 의자만 장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몬태나에서 2년 넘게 살고 있었던 쌍둥이네 집에는 정말 많은 살림들이 잘 갖춰져 있었다. 미국은 중고 물건의 거래가 활발하기 때문에 이사 갈 때 물건들을 팔게 되면 돈을 벌 수가 있다. 하지만, 쌍둥이네는 파는 것도 귀찮고 일이라며 쓰던 물건 받는 것이 괜찮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고 싶다고 했다. 아직은 살림살이가 다 갖춰지지 않아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많은 상황에서 너무 감사한 제안이었다.


쌍둥이네가 떠나는 날, 집안 정리를 도와주러 집으로 찾아갔다. 남편 친구들인 중국분들이 여럿 와 계셨다. 이미 청소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떠나는 길은 중국 친구가 운전을 해 준다고 했다. 기약 없는 작별 인사를 뒤로 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 마음이 그렇게 헛헛할 수가 없었다. 짧은 약 두 달 간의 만남 동안 우리는 참 많이 만나고 웃고 추억을 쌓았다. 책상, 책꽂이, 테이블, 건조기, 거울, 옷걸이, 자전거, 칼 그릇 세트, 각종 베이킹 도구들 그리고 빵기계 등등. 우리에게 준 모든 물건들은 그 후 보즈만에서 생활하는 내내 정말 요긴하게 쓰였다.


무엇보다 제과 제빵에 눈을 뜨게 해 준 덕분에 나는 점점 요리에 흥미가 생겼다. 반죽기로 여러 가지 빵과 더불어 떡도 만들어 먹게 되었다. 찹쌀로 밥을 지은 후 빵기계의 도우기능으로 30분만 치대면 떡 반죽을 만들 수 있었다. 찹쌀가루와 전자렌지를 이용해서 만드는 떡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쫄깃쫄깃 했다. 콩가루를 묻히면 인절미, 앙금을 넣으면 찹쌀떡이 만들어졌다.


몬태나에서 사시는 한국 분들께 떡을 나눠드리니 직접 떡을 만들어 먹어본 적이 없다며 쿠킹클래스를 제안하셨다. 한국 사람들 중에 외국 생활은 제일 짧은 새내기였지만 떡 레시피를 알려드리고 함께 떡을 같이 만들어 먹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빵을 굽기 시작하면서 요리에 점점 자신감을 갖게 된 나는 다양한 한식과 양식에도 도전해 보게 되었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 가운에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는 것은 기적이다. 몬태나에서 우연히 시작된 인연은 단 두 달간 이어졌고 그 인연은 다시 홀연히 떠나갔다. 나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떠난 친구야, 다시 한번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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