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 10

이상한 나라로 간 앨리스

by 김민정

하늘이 꽤나 청명하다. 전방으로 시선을 돌린 지안의 앞에 대전 톨게이트가 펼쳐지고, 잠시 신호에 걸린 그녀는 친정엄마 춘희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거의 다 도착했는데, 승재 학원에 좀 들려서 태희랑 저녁 먹고 늦게 들어갈 것 같아요.

가볍게 통화를 마친 그녀는 친구 태희의 논술학원으로 향한다. 돌싱인 태희는 고등학교 시절 베프로 이혼 후, 대전에서 대형 논술학원을 운영 중이다. 마침 승재의 어휘력이 또래 아이들에 비해 현저하게 못 미치는 수준이기에 가장 아랫반에서 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게끔 했다. 그리고 가끔씩은 태희가 오롯이 끼고 과외도 수시로 진행해 주곤 했으니 지안은 늘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나마 태희라도 의지할 사람이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그녀는 태희에게 두고두고 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계속 고민하면서 가볍게 액셀을 밟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신랑의 강력한 권고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매번 이곳에 내려올 때마다 드는 착잡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친정엄마는 무슨 일만 생기면 여전히 지안을 찾았다. 맏딸보다 체력이 더욱 좋은 춘희는 여전히 쩌렁쩌렁한 기세로 온 동네를 휘어잡을 듯한 카리스마로 휘몰고 다녔다. 딸에 비해 엄마가 그 기가 너무 세서 지안이 더 승승장구하지 못하는 거라고 언젠가 점쟁이가 넌지시 한마디 한 적이 있었다.

-너는 그냥 엄마랑 떨어져 살아. 친정엄마가 네 앞길 다 막을 거야. 최대한 멀리 가.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는 듯도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매번 속상한 일이나 기댈 곳이 필요하면 지안에게 전화하는 친정엄마도 하루빨리 정신적인 독립을 시켜 드려야겠다고 다짐했기에 요즘에는 굳이 지안이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친정엄마 춘희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공주처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며 살았기에 사업이 망하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집안이 주저앉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주처럼 살던 버릇이 남아있었다. 때문에 힘든 일만 생기면 딸에게 쪼르르 전화를 걸어서 지안이 늘 그녀의 감정쓰레기통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승재를 맡긴 죄책감에 지안 역시 그 모든 것들을 감내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의 사생활까지 다 받아줄 여력도 없었고, 때문에 최근에는 그녀의 냉랭한 태도에 몹시도 서운해하셨지만 혹시 모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엄마와도 서서히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지안은 차에서 내려 조용히 승재의 교실로 향했고 교실 밖에서 빼꼼히 들여다보니 승재가 분주히 가방을 싸고 있었다. 똑똑. 학원 교실 문을 두드리니, 태희가 하던 업무를 멈추고,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응... 그냥 좀 답답해서.

태희는 지안의 표정만 봐도 그녀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친구였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빙그레 미소 지어주는 태희.

그때 승재가 와락 지안 품에 안겼다.

-엄마!

승재를 안아주는 지안의 눈에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울 애기 엄마 많이 보고 싶었구나. 엄마가 미안해

분위기를 눈치챌 새라 태희가 재빠르게 축구장에서 친구들과 잠시 놀고 있으라며 밖으로 아이를 내보냈다.


아이스커피 한잔을 타서 조용히 내밀며, 태희는 지그시 지안을 바라봤다. 표정 없이 축구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딴생각에 잠겨있는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지?

지안이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자신의 병에 대해서 바로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순간 많은 고민이 됐지만 아직 태희에게 자신의 병을 당당하게 고백할 수는 없었다. 친구들이 가슴 아파할 것을 생각하면 최대한 늦게 전하는 것이 그녀들에 대한 지안의 작은 배려였기에 조용히 화제를 돌렸다.


-태희야, 난 같은 엄마인데 어떤 날은 사람들이 날 공주로 만들어주고, 또 어떤 날은 날 비참하게 무시해. 그 사람들 때문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

그녀는 지안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가슴이 아팠다. 두 아들의 엄마인 지안의 첫째는 소위 말하는 영재로 어렸을 때부터 총기가 넘쳐서 학군지에서 아주 유명한 아이였다. 그렇게 어딜 가나 대접받던 그녀에게 둘째가 태어났고, 그런 둘째가 몇 년 전 발달장애 판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삶에 스멀스멀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둘째 아이를 정상범주 안으로 돌려놓기 위해 노력했지만, 상황은 나날이 안 좋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최근 몇 년 사이 부부관계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승재를 통해 그녀와 조금 더 자주 접점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유부녀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그녀였지만 여전히 십 오 년 전의 순수했던 친구일 뿐이었다. 그 시절부터 맑았고 우아했던 지안 역시 강남에서 깍쟁이 엄마들만 상대하다가 수진과 태희를 다시 만나니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애틋하게 그리워했던 그녀의 소싯적 동무를 이곳에서 그렇게 우연히 만나게 된 이후로 그들은 매달 술친구가 되어 버렸다. 잠시 후, 태희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둘은 승재를 춘희에게 데려다주고 근처 호프집으로 이동했다.

- 자. 이제 빨리 얘기해 봐. 뭐가 또 더 있지?

말없이 딴생각에 잠겨있는 지안을 보고 태희는 대번 눈치챘다.

-나 승호 만났어.

지안의 말에 놀라서 물을 마시다 말고 뿜을 뻔했던 태희가 토끼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뭐? 어디서?

- 승현이 학원에서.

-걔가 거기 왜 있어? 걔 미국에 있는 거 아니었어?

-몇 년 전에 노안동에서 중고등 입시학원을 오픈했었는데 그게 잘 돼서 대현동까지 넘어왔나 봐. 애 입학설명회 갔는데 승호가 오프닝을 하는데 나 정말 기암 하는 줄 알았다.

-왜 아니었겠니. 세상에. 정말 오래 살고 볼일이다. 어떻게 너희가 다시 만나니.

심란하다 정말.

이거 정말 인연 아니니?

-인연이면 뭐 이 나이에 유부녀 다 돼서 다시 시작이라도 하라고?

지안이 피식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런 지안을 보면서 태희는 마치 본인의 일이라도 된 양 안타까워했다.

-아 신이시여. 이 무슨 운명의 얄궂은 장난이란 말입니까.




- 저작권 등록 완료-

초고 묘사 수정 중. 협업문의 환영.

저자 순수창작물.

A5 300페이지 분량의 장편 소설임.



원고 투고를 위해 일단 여기까지 오픈.

나머지는 책으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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