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꽂히고 싶을 때
“이 아침의 행복을 그대에게..”라는 카톡 문구가 배달되었다.
무엇하나 잃어버린 듯 정돈되지 않은 아침이다.
갑자기 시력이 뚝 떨어졌다는 느낌을 알아차리고 한쪽 눈을 감고 떴다 감았다를 반복해 보았다. 분명 불편하고 개운치 않은 느낌이 달겨 붙었다.
요 며칠 사이에 많은 비가 내려 전국을 수마로 훑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근심과 걱정을 안겨주고 지나갔다.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은 금방이라도 태워버릴 듯 뜨겁다.
200년 만에 온 동네를 삼켜버린 극한호우가 내렸다고 한다.
엄청난 폭우로 도로가 유실되고 가옥이 침수되어 많은 사람들의 인명도 앗아갔다. 요즘 닥치는 자연재해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재라고 입을 모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주천에는 흙탕물이 사나운 모습으로 흘렀으나 오늘은 평온하기만 하다.
경기, 충청, 광주, 경남 쪽이 특히 피해가 집중되었다고 뉴스를 통해 알려 온다. 다행히도 전주에는 많은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뉴스 중간에 안타까운 소식도 들었다. 어느 농가에서 키우던 소들이 폭우로 떠 내려가다가 겨우 길가에 올라서서 두려운 눈망울로 도움을 기다린 듯했다.
이 소들의 주인 부부가 산사태로 목숨을 잃어 결국 소들은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한 번쯤은 걱정거리 하나 없는 완전한 쉼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내편 하나인 누군가와 말이다.
힐링, 내 인생극의 주인공이 되어 온전한 평화로 가득 채운 그런 날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비가 갠 후 첫날을 맞이하여 건지산 무장애 숲길에 들어선다. 본격적인 더위를 알리는 매미소리는 가장 높은 데시벨을 기록하고 있다. 그늘이 있는 숲길이지만 걸음을 따라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액체의 이동을 느끼게 된다. “후덥지근하다.”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습도가 높은 여름날 이곳에는 그나마 하루를 견딜 수 있는 피톤치드를 마음껏 들이마시게 된다.
초록으로 변신한 나뭇잎들 사이로 밤새 빗줄기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길 위에 떨어져 있어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건지산 가는 길에 보게 되는 덕진연못에는 세찬 빗방울에 꽃잎마저 떨구어 초라하더니 햇볕이 나니 금세 화려한 밝은 핑크빛으로 연못을 채워 놓고 있다.
귀뚜라미 한 마리가 내 차 본넷 위에 올라서 나와 같이 건지산으로 향했다.
나이 들어간다는 의미는 어쩜 새삼스럽게 내편 하나 찾아보는 것일 게다.
모두가 삶의 터전으로 바쁘게 달려가고 나면 우리 같은 부류는 한가한 일상에 접어든다. “무슨 일 하나 해 볼까.” 생각하다 보면 금세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세상 속의 관심 보이지 않는 존재로 전락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무심코 핸드폰을 들고 관심 끄는 유튜브에 정신 팔고 있는 떨어진 낙엽처럼 관심 없는 일상에 서있게 된다.
도서관에 가고 싶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은 조용한 도서관에는 책 냄새만이 손때 냄새와 더불어 한쪽 구석에 몰려 쌓인다.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은 도서관은 어쩜 더욱 고립된 시간이 될 줄 모른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내편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잠시 헛된 생각을 하노라면 언제 그랬는지 모기가 뒷다리를 곧게 세우고 내 팔뚝과 장딴지에 침을 꽂고 달아나 버린다.
한참을 가려움에 비비고 침을 발라도 시원하지 않을 때 내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내가 어떠한 일을 당할지라도 진정으로 내편이 되어주지 못한다.
매일매일 나는 이 길에서 걸음을 걷지만 늘 혼자라는 생각에 헛헛한 가슴을 쓰다듬게 된다.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밥상에서도 자녀들이 챙겨주는 기념일에도, 손주들의 재롱을 보더라도 나는 늘 혼자라는 외로움에 말하는 것조차 잃어가고 있다.
키가 큰 플라타너스 한그루가 이번 비에 쓰러져 넘어져 있다.
가지가 부러지고 푸른 잎들도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키가 큰 나무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부러지는 것을 보면서 아무도 그 나무를 지탱해 주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아마도 그 나무도 든든한 자기편이 없었나 본다.
요즘 세상은 참으로 메마르고 핫하다. 아마도 정글의 생존보다 더욱 참혹한 광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람들의 관계인 것을 보게 된다.
상대가 짓이겨져 다시 일어날 수 없게 완전히 내쳐져 사라질 때까지 끈질긴 공격을 하게 된다. 이럴 때 “내편이 되어줄 사람 하나만 있어도 다시 잎을 내고 기운을 차릴 수 있을 텐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내가 붓을 들고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를 때 “아름다운 정원을 그려보면 어때?”라든지 “네가 좋아하는 능소화를 그려보면 어때?”라고 거들어 주는 내편이 있다면 한 번쯤은 내편 곁에 날 맡기고 기대어 보고 싶기도 하다.
하얀 뭉게구름이 저만큼에서 나를 부르는 듯하다. 어쩜 저렇게 하얀 구름일 수 있을까?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마사토 길은 사그락 거리면서 내편이 되어주고 있다.
매미가 목청을 높이고 악을 쓰듯 울어대도 같이 소리 내어줄 내편이 있어서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매일 걷는 그 길에서 고독과 외로움에 안정되지 않은 마음을 출렁이며 양동이를 이고 자꾸 물방울을 훑어 던지던 어머니의 머리에서 똬리가 편을 먹어주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무하고도 말벗이 없지만 내 발이 내편이 되어 내가 가자고 길을 잡으면 그 길을 걸어주는 내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편은 언제나 자기 생각은 뒤로 하고 먼저 나를 챙겨주는 파트너인 것이다.
지금은 어렸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친구가 되기 어렵다.
또 서로에게 마음을 다 터놓고 지낼 수 없음은 이미 성년을 지나 노년의 길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고독과 가난과 차별이 있다 할지라도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소년이여, 꿈을 펼쳐라!” 외치던 때는 오래전에 그 의미를 상실했고 중년을 거치면서 세상에서 구별되고 배제되는 아찔한 수난들을 경험하고 있다.
이미 머리는 희어졌고 피부는 거칠고 늘어져 주름골이 깊어져 볼상 사나운 노인의 바람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어느 날 나의 다리가 가늘어지고 착 달라붙어 몸매를 드러내던 근육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죽음의 시간에서 작아지고 수척해진 모습은 측은지심을 드러내는 안타까운 모습이 되어 누구 하나라도 내편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구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다.
내가 살아왔던 과정에서 입안에 것도 나누어 먹던 우정이나 내 친구가 맞으면 내가 맞은 것처럼 아파하던 때는 지금 이 순간에 아득한 그리움으로 그려지는 아쉬움일 것이다.
나와 평생을 약속하고 내편이 되어주겠다던 아내의 약속은 버려진 지 오래된 듯하다.
내 곁에 내편 하나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내가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고 보호받아야 할 신세로 떨어졌음일 것이다.
수박 한 통을 사들고 집에 들어와 이렇게 더운 날 갈증을 달래 줄 수박 한쪽이면 좋겠다 생각에만 그친 나는 ”“또 뭐 하러 수박은 사 왔어? 냉장고에 넣어둘 공간도 없는데.”퉁명스러운 아내는 혹시나 했지만 내편은 분명 아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분가를 하고 자기들만의 방식대로 아이들 낳아 기르며 잘 살아가고 있어서 나에게는 즐거움이며 보람이지만 이들도 결국 내편은 아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며 누구도 나에게 가라고 하지 않은 길을 걸었다. 언제 어디까지, 얼마큼 걸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걸으며 생각했다. 시장에 들러서, 식당에 문을 밀치며 들어설 때도, 요즘처럼 흔한 카페에 들어갈 때도 내 편 하나 없음에 고독하고 쓸쓸한 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슬프기도 했다.
햇살 뜨겁게 쏟아지는 날 뭐 한다고 연꽃방죽에 들어가 연꽃을 찍는다고 종종거렸는지...
그늘지고 경사가 없는 길만 골라 다니는 나는 내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마에 땀을 훑으며 잠깐 스치고 지나간 시원한 바람에 안심하며 헛헛한 마음을 달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