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

by 남재 이진주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다가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기를 반복하더니 오후 늦게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지만 올가을에는 유독 비가 자주 내린다. 여름내 달구었던 지열을 식히느라 그러는지 습한 공기는 방향을 잃은 듯하다.

나는 오늘도 황가람의 “반딧불이”노래를 나지막하게 흥얼거리고 있다.

비에 젖은 허수아비처럼 무표정하고 초라한 모습을 닮았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나는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가을 하늘 아래에서 헌데 옷을 입고 두 팔을 벌린 채 말이 없는 허수아비 마냥 쓸쓸해 보이는 모습으로 파란 하늘에 흰구름만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도 한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벙어리가 냉가슴을 앓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감출 수 없다.

젊고 잘 나가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가을날 나는 내가 이미 군상들 틈에서 밀려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나는 파도처럼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무리 치장을 하고 멋지게 폼을 잡는다 하여도 아무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여도 상대방은 동문서답을 하게 되니 소통이 안 되는 내가 겪게 되는 답답한 심정은 달리 표현 길이 없다.

황금빛 들판을 지나다가도 멈칫하게 되는 것은 살아온 날들에 대한 아쉬움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의 걱정이 밀려오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하여도 그 사랑은 온전히 고난을 동반한 쓰디쓴 눈물 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다.

황톳길 코스모스길을 함께 걸으며 밤이 그렇게 깊은 숲인 줄 몰랐던 젊은 날들이 차가운 바람이 되어 겨드랑이를 파고든다.

나는 요즘도 변함없이 아침이면 얼굴에 물을 묻히고 거품을 바르고 다섯 줄 칼날을 비스듬히 누이며 턱 주변을 긁어내린다.

밤새 자라난 얼굴의 털들을 깎아내고 한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면 제법 보드라운 피부로 변신하게 된다.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물기를 말리고 화장대 앞에 앉는다.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매일 아침 의식처럼 갈래 골이 생기는 얼굴을 관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한참이나 거울을 보고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 보지만 거울 위에 걸려 있는 젊은 시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달팽이 미스트를 얼굴에 뿌리고 콜라겐 크림을 바른다. 톡톡톡 손가락을 세워 주름진 눈 주위와 이마와 볼을 두드린다. 다음에는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그 위에 오일크림을 살짝 찍어 펴 바른다.

마지막으로는 선크림을 바른다.

이런 노력을 삼백예순날 하루도 빠짐없이 해 보았어도 거울에 보이는 얼굴은 세월을 반영하고 있으니 서글픈 추억이 하나, 둘 가슴을 아련하게 한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스쳐 뿌리는 빗방울이 창문을 닫게 하고 마음 문도 닫게 한다.

우산도 없이 나섰다가 잠깐 내리는 비를 그냥 맞아 보았다.

이때쯤은 환절기라고 하여 감기에 조심하라고 한다.

아무리 우겨보아도 나는 어쩔 수 없는 면역력 떨어진 노인이 되었다.

손주들이 다섯이나 생겼고 내 아이들은 어느새 사십 대를 살고 있으니 내 어찌 오늘같이 바람이 차가워지는 것을 몰라라 할 수 있을까?..

젊은 시절 창호지 창문에 달빛이 비치면 잠 못 이루고 조용필의 노래“미워 미워 미워”를 소리 내어 불렀던 기억이 있다.

늦은 가을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면 창문 틈새로 스멀스멀 밀려오는 그리움이 미움이 되어 불러보던 노래다.

“나뭇잎이 떨어져 바람결에 뒹굴고 내 마음도 갈 곳 잃어 낙엽 따라 헤매네. 잊으라는 그 한마디 남기고 가버린 사랑했던 그 사람 미워 미워 미워”

“이슬비가 내리네. 소리 없이 내리네. 님을 잃은 내 가슴을 하염없이 적시네. 잊으라는 그 한마디 남기고 갈 바엔 사랑한다 왜 그랬나요. 미워 미워 미워”

오늘따라 이 노래가 가슴을 여미며 추억에 젖게 한다.

이별 아닌 이별을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촉촉해진 눈물을 훔쳐낸다.

왠지 가을은 우리네를 쓸쓸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계절이다.

풍요로운 가을걷이를 다 마치고 나면 논둑에 홀로 남아 화려했던 존재감을 드러냈던 허수아비의 전성기가 바람결에 쓸려가 버린 꼴이다.

나의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비가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면 또 다른 시간 앞에서 몸부림치게 된다.

더 많이 사랑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온 마음을 휘감는 하루이기도 하다.

나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이 헛된 꿈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나는 오늘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빛바랜 사진첩을 바라보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나는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이 노래 가사가 오늘따라 의기소침한 내 맘을 위로해 주고 있다.

오늘 점심때는 익산에서 살고 있는 후배를 만나서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는 혈기 왕성하고 굽힐 줄 모르는 정의감과 승부욕이 강한 상남자라고 자칭 그랬다. 이 후배를 처음 만났던 때는 30여 년 전이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몸매와 잘생긴 얼굴을 하고 언변도 좋아 여성들이 호감을 갖는 멋진 남자라고 나도 인정했었다.

가끔은 넘치는 자신감이 본인에게는 마이너스가 되기도 했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고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맞이하게 되었다.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궁금하지도 않았던 자신감이 넘치던 그다.

사람 일은 알 수 없다 했듯이 어느 날 알 수 없는 시간에 몸이 균형감각이 잃고 이상증세를 보이게 되었다고 했다. 가까운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정밀한 검사가 시작되었고 그는 꺼져가는 등불 앞에 선 모양으로 두려움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도 비가 하루 종일 내렸었다. 애써 감추고자 하는 그의 모습에서 지난날의 자신감 넘치는 밝은 모습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의 병명은 악성 뇌종양이라고 하며 의료분쟁이 있었어도 다행히 빠르게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

수술 후 그를 만나본 나는 참 다행으로 생각했다. 예전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어눌한 말투와 행동은 재활치료를 통해 좋아질 수 있다고 했다. 그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맑아 보였다.

그를 다시 만나기로 한 지난달에 매월 한 번씩 만나서 밥도 먹고사는 얘기도 하자고 해서 오늘 또 만나기로 한 날이다.

나더러 “형”이라고 자연스럽게 부른다. 전에는 그런 표현을 안 했던 그이다. 오늘은 아내가 태워다 주어서 조금 일찍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다. “형, 무엇으로 시킬까요? 이곳은 꼬리곰탕이 일품이니까 꼬리곰탕 시킬까요?”했다.

나는 그가 좋아하고 잘 먹는 음식으로 따라가려고 했기에 그러자고 했다.

오늘 만난 그는 예전보다 행동이 느려지고 앉고 일어서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이곳은 안타깝게도 좌식 식탁이라서 앉고 일어서는 것이 상당히 불편할 수 있었다. 이곳 식당으로 정한 것은 나인데 미처 그것까지는 살펴보지 못해서 미안했다.

“밥은 선배가 사는 거니까 맛있게 먹어.”

나도 오랜만에 이 식당에 왔다. 익산에 근무할 때는 가끔 찾았던 곳으로 곰탕이 주된 음식이었다. 노 마님께서 아직도 건재하시고 그분의 살핌으로 맛도 변함없이 지켜가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숟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는 그에게서 전에 절제되지 않은 성격을 볼 수 있었다. 몸이 불편하니까 그러는지 서빙 아주머니의 사소한 언행에도 상당히 거슬린 표현을 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차가운 바람이 부는 듯했다.

밥을 맛있게 먹고 찻집에 들러 차는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녹슨 간판에 시골 다방 같은 찻집 내부는 정겹게 느껴졌다.

나는 오늘 이 후배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어쩜 우리는 똑같은 과정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한때는 윤기 나는 얼굴로 정의롭고 당당하며 유연하면서도 진취적인 시간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었다.

사랑도, 일도, 관계도, 봉사도 모든 분야에서 그랬다.

바람은 불었으나 따뜻한 바람이었다.

다시 읽어보는 나의 젊은 날의 대표작품 표상도 그랬다.

집옆 텃밭에 가을 마늘을 심고 계시는 할머니에게 한마디 건네기도 하고 길가에서 담 너머 깔끔하게 정리된 집주인에게 인사도 건네 보았다.

그런 내 모습은 왠지 내 눈에 비치는 그 노인분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을 알게 되고 발길을 따라 부는 바람이 무심한 듯 차갑게 느껴졌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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