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는 고향집으로 가고 계신다.

울 엄마가 가고 싶다는 집은 어디일까?

by 남재 이진주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창문을 바라보니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우리 집은 아파트로 여러 동이 겹쳐져 있어서 아파트 벽 외에는 빼꼼한 하늘만 조금 보일 뿐이다.

나는 이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내가 이곳에 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25년이 넘은 듯하다. 이 집에 이사 와서 모든 일들이 형통하였고 가족들도 건강하게 잘 살아왔으니 정이 많이 들었다.

그동안에 몇 번이나 옮겨볼 생각을 하였으나 아이들이 “아빠, 그냥 이 집에 살면 안 돼요?” 하길래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던 아이들이 지금은 출가하여 자기 집을 마련하고 아이들을 셋, 둘 낳아 잘 기르며 살고 있다.

요즘에는 가끔씩 지 엄마에게 “아빠랑 엄마도 좀 더 넓은 곳으로 가면 안 돼?”한단다. 그 이유는 자기네 아이들을 친정집에 맡기기도 하고 자기들도 때론 좀 더 여유롭게 지내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몇 년 전에 새롭게 형성된 지역에 청약을 하여 당첨되었으나 너무 높은 층이 되어 여러모로 생각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주위에서는 나더러 바보 같다고 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투기를 목적으로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당첨이 되면 P를 받고 되팔기도 했다. “가지고 있으면 금방 아파트값이 오르고 그때 전매하시면 이득이 될 텐데요.” 하며 오히려 남이 더 아쉬워했다.

나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번거롭고 정상적이지 않는 일에는 나서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파트 건설회사에서 몇 번 전화가 왔으나 “나는 계약할 의사가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라”라고 포기했다.

그러니 나더러 바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바보는 진짜 바보가 아니다.

세월은 곡식이 익어가기를 반복하며 구름 사이로 멀어져 갔다.

내가 사는 집은 나에게는 편안한 안식처이고 꿈과 행복을 이어가고 있는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가끔 새롭게 지어진 아이들의 집을 방문할 때면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집은 바로 옆에 천이 흐르고 운동하기 좋은 길과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가끔씩 수달도 보고 왜가리와 텃새 오리도, 쇠백로 등 여러 동물들도 우연하게 만날 수 있는 생태하천을 끼고 있어서 작지만 평화스러운 내 집이다.

다섯 손주들이 왔다가 가고 나면 청소하는 일도 버겁고 힘이 드는데 큰집에서 살다 보면 핑계 같지만 내 할 일만 더 늘어나는 것이 뻔하게 생각된다.

이렇게 집은 오래 살아서 좋고 싫든 좋든 익숙해져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

추석을 며칠 앞둔 연휴의 시작이다.

세종에 사는 동생네가 오늘 시간이 된다고 하여 군산에 사는 누나네랑 상의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만나자고 했다. 오늘은 조카들도 올 수 있으면 와서 함께 짧은 시간이나마 어머니와 보내고 싶었다.

울 엄마는 몇 해 전부터 군산의 요양원에 계신다. 나이가 드시면서 혼자서 일상생활을 하시기에 어려움이 생겨서 형제들과 의논하여 그나마 보호 환경이 괜찮아 보이는 곳에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다. 어머니는 이곳 생활에 다행스럽게 잘 적응하고 계신다.

이곳에 어머니를 맡기게 되면서 나는 많은 마음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멀리에서 살고 있는 동생이나 늘 바쁘게 살아가는 누나에게 어떤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전적으로 어머니를 케어해 왔기 때문에 일련의 일들도 내 몫으로 알고 불만 없이 담당하고 있다.

부쩍 쇠약해진 우리 엄마는 가끔씩 노래하는 것과 집에 가고 싶다는 것 외에는 다른 표현을 따로 하지 않으신다. 가까운 기억은 점점 잊혀 가고 오래된 기억들만 새록새록 살아나고 있는 듯했다.

처음에는 몇 년 전 기억은 하였으나 지금은 점점 더 오래된 기억들에 접어들었다. 나는 이렇게 변화해 가는 과정을 가슴 졸이며 심상찮게 바라보고 있다.

우리 엄마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셨다고 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위로는 언니와 아래로는 남동생이 있었다고 했다.

1945년 8월, 일본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지고 나가사키에 두 번째 폭탄이 떨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결국 일본의 천황은 항복을 선언하고 태평양전쟁은 막을 내렸다고 한다.

일본이 항복하게 되자 일본에 거주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둘러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9살이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무사히 귀국하게 되었고 전남의 시골 섬마을에 정착하여 이모 두 분과 두 분의 외삼촌을 더 두셨다고 했다.

나는 외할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이 없으나 나름 동네에서 부유하게 살았다고 했다. 대리라는 마을에는 일가친척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아 일본에 가기 전에 살았던 곳이라는 추정도 해보게 된다.

나는 어렸을 적에 외갓집에 종종 가곤 했었다.

오래된 기억으로는 <덕봉산>이라 불리는 마을 뒷산이 있었고 오래된 팽나무가 마을을 수호해 주고 있었다. 덕봉산 밑에는 성당이 있었고 어머니는 할아버지 몰래 신발을 들고 교회에 다녀오곤 했었다는 기억을 하고 계셨다. 그래서인지 오래전에 부르던 찬송을 지금도 가사도 틀리지 않고 부르신다. 마당을 나오면 삼거리 같은 곳에 우물이 있었던 것과 이 우물가는 동네 사람들의 정보마당이 되었다는 기억도 선명하시다.

외할머니는 무척이나 인정이 많으시고 따뜻했던 사랑이 많으셨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외갓집에 가면 흰쌀밥에 고깃국이 늘 있어서 자주 가고 싶었던 고향집인 곳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막내 이모는 나를 많이 사랑해 주었다.

인자하신 외할머니는 환갑이 채 안되어 뭣이 급했던지 갑자기 돌아가시고 외삼촌들도 시골을 떠나게 되면서 울 엄마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고향집은 흔적도 없어져 버렸다.

오늘도 울 엄마는 차에 오르시면서 나에게 묻는다. “어디 가려고? 나 집에다 데려다주라. 집에 가서 혼자 지내면서 울 엄마 산소도 돌아보고 하게.” 하신다.

울 엄마는 군산에서 오래 사셨다. 가난한 그림자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날마다 조개 가슴에 칼을 쑤셔 넣어 까고 똥 따고를 반복하며 수북이 쌓여가는 조개껍데기를 두 발로 밀어내며 사계절 자기 시간도 없이 한스러운 삶을 사셨다.

작은 섬에서 이장을 보던 아버지가 그렇게 미웠다는 어머니는 마을일 보기 때문에 면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이 없는 살림에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회상하곤 했었다.

전기도 없는 섬에서 아이들을 다섯이나 낳았으나 살림살이는 좋아지지 않았다. 원망스러운 우리 아버지의 “황소처럼 일 만하셔도 살림살이는 마냥 그 자리”란 노래 가사처럼 암울했던 그 시절이 그려진다.

울 아버지도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형은 6.25 때 전사하시고 충격에 일찍 세상을 떠나신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된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기도 하다. 녹록지 않은 섬 살림에 가장이 되어 여러 형제들과 살아가기에 버거웠을 우리 아버지는 강한 책임감으로 고군분투하였으나 결국 고향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곳 섬에서 내 바로 밑에 밑의 여동생이 결핵을 앓다가 목포 병원으로 갔으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슬픈 내색조차 못하고 시골집과 논밭을 팔아 나머지 아이들을 데리고 군산에 오셔서 배 사업을 했다. 그 배마저도 보증 잘못 서서 빼앗기고 무너지는 아버지 가슴의 병을 누가 알아줄까? 그때가 40대 초반이었으니 65세를 넘긴 내가 지금 생각해도 그 아픔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마땅히 살 집을 구하지도 못하고 남의 집 귀퉁이에 작은 방 하나 얻어 살았다고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두 번째 동생도 군산에서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다가 알 수 없는 병(장티푸스로 추정)을 앓다가 떠나고 말았다. 내 기억으로는 울 엄마가 담배를 입에 물기 시작했던 때라고 알고 있다. 전쟁도 아닌데 두 딸을 가슴에 묻었으니 그 설움을 그 누가 알까?

나는 목포 삼촌집에서 중학교를 다니라고 맡겨두고 오셨던 것이다.

한참 후에야 겨우 작은 집을 지었으나 오래 살지 못하고 군부대가 확장하면서 동네가 철거되어 시내에 있는 아파트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고난 속에 살아오신 엄마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너무나 크신 것을 나는 안다.

11년 전에 병을 얻어 돌아가신 아버지와 살던 집은 이미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내가 가끔 아버지 예기를 넌지시 건네면 모르는 듯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엄마, 아버지 안 보고 싶어?” 하면 “안 보고 싶어.”라고 짧게 답하고 만다.

내가 어른이 되고 할아버지가 되어 늙어가니 부모님의 인생 역정이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채워지는 듯하다.

오늘도 울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니 진도아리랑 곡조에 개사를 하여 부르신다.

“우리 집에 서방놈이 명태 잡으러 갔다네. 바람아 불어라 석 달 열흘을 불어라”

한 많은 울 엄마의 야윈 모습에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모든 것 다 버리고 미혼이었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곁으로 가고 싶으신 것이다.

섬에서 살 때 외삼촌이 손수 지어주셨다는 집도, 군산에 와서 지었던 집도, 시내 아파트도 울 엄마의 집은 아니었다.

이제와 자식들 다 떠나고 빈 둥지만 남은 쓸쓸한 노년에 가고 싶다는 그 집은 울 엄마가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천국의 고향집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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