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효과
얼마전 현장의 교사가 문제행동을 보인 학생에게 교장실에 가 있는 벌을 주는 경우가 있다는 연락을 주었다.
학교에서 아이들 간의 싸움이 생기면 부모의 싸움으로 번지면 안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아이들의 싸움이 어른의 싸움으로 확대된 사례는 많이 있다.
이유는 어린 시기 아이들의 하얀 거짓말, 자기중심적인 입장 차이 때문이다. 그런데 갈수록 교사와 부모의 갈등을 대척점에 놓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그들이 진정으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또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어른이 맞는가 하는 점이다. 실제로 누군가가 아이를 때려서 문제가 됐을 때 소송전이 아니라 때린 아이한테도 사과할 기회를 주고, 맞은 아이에게도 용서할 기회를 주며 부모끼리도 서로 용서와 화해를 하도록 돕는 게 어른의 역할이었는데, 어느덧 우리는 고소와 소송으로 얼룩진 세상에 살면서 서로 먼저 사과했어야 한다며 결국은 어른들 간의 싸움 속에서 아이들을 놓치고 만다.
어른들의 싸움은 부모와 부모뿐 아니라 부모와 교사간의 싸움도 있다.
아이에게 녹음기를 넣어서 보낸 것은 신뢰를 잃어버린 부모의 탓이라며 해당 아이는 그런 대접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이야기하는 교사들의 글이나 기사를 읽을 때 걱정이 드는 건 나만의 기우일까. 녹음기를 넣어 보낸 것은 잘못한 일이다. 그러나 학부모가 학교에 신뢰를 갖지 못하는 이유와 대안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 부모가 오죽 했으면 녹음기를 넣어 보냈을까도 성찰해야 한다. 서로 화해시키고 용서하게 해야 할 교육자들은 교권이라는 미명하에 부모를 낙인찍고 아이를 좌표 찍어 다른 학교에 전학을 가지 못할 처지로 홈스쿨링하게 된 것은 부모가 자초한 일로써 그 아이에겐 응분의 당연한 결과라는 복수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교육이 할 일일까. 이러한 보복성 조치와 대응은 자녀를 키우는 보호자에 대한 감정적 투사로 비춰져 학교에 대한 불신을 초래한다.
아동학대와 교권보호는 대척점에 있지 않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내러티브가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안의 디테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00초 사건은 미완의 해결이지만, 해당 사건보다 1년 전 발생한 아동학대 사건이 00초 사건의 수면 위로 올라와 교권보호 사안과 상충된 의제가 된 이유는 자폐성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연예인 아버지라는 내러티브가 타겟팅에 용이하고, 어그로를 끌 수 있으며, 관련 단체는 회세를 확장할 수 있고, 누군가는 사업 확장과 정치 입문을 촉진할 수 있다. 심지어 장애학생이 왜 특수학급에 안가고 일반학급을 오냐는 댓글을 무수히 다는 사람들에게 장애인을 혐오하고 통합교육이 아닌 교육기관으로 분리시킬 명분으로 활용된다.
소속된 어느 단체나 발전적 아이디어로 추진하는 일이겠지만 그 해결점이 교사와 부모를 대척점에 두어서는 발전적 방안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앙갚음은 교사란 절대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실존이라는 당위적 사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모두 적으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는 교육계의 현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폭넓은 사고를 교육하길 원하는 부모들은 다양한 시각에 시각과 관점으로 운영되는 학교들을 찾아보고 다닌다. 그래서인지 부모님들 중 지역사회에 대안 학교를 만들거나 직접 운영을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 전문 능력을 가진 부모도 많기에 관련 교육 전문가에게 자문을 받아 학교 설립을 계획하기도 한다. 공교육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의 입장에서 보면 작금의 사태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우리의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똑바로 된 교육을 한다고 하면서 한명쯤은 포기해도 된다는 생각, 어른 간의 갈등으로 아이에게 피해가 되어도 외면하는 그런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봐야 된다. 어린 시절 부침이 있었거나 치기 어린 행동을 했던 전설의 리더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조언은 조직은 개개인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일치된 견해인데, 교육은 어떠한가.
주위 지인 중 정년퇴직하신 교장선생님은 ‘나라면 그 당시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 속에서 장애아동 관련 종사자는 아동학대 신고의무자이기 때문에 상황을 인지한 즉시 일단 신고를 하도록 되어 있다고 하였다. 신고 이전에 사과하도록 조율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첫단추이다. 의문은 2학년 저학년 부모에게 아동학대 사안을 직접 신고하라고 안내한 회피가 문제의 시작점이라는 문제 제기를 왜 하지 않는가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부모에게 첫자녀의 교육으로 불안해할 때 어떻게 안내해야 하는지 지침은 마련되어 있는가, 전문적으로 상담할 인력이 있는가, 문제가 생기면 또는 민원이 불편해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공직사회의 민낯이기도 하다. 결국 통합교육의 시스템 부재라고 하지만, 시스템은 학교 경영과 운영의 리더십이 근간이 된다.
2년 전 한국을 달군 10살 자폐성장애아동의 행동과 관련된 기사는 참으로 잔인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듯, 전문성 없는 기사는 아동학대 사건 피해자를 마녀사냥하며 또 다른 피해 양산의 책임조차 무감각해진 상태로 조회수를 올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부모가 학교에 대해 신뢰를 저버렸다, 부모가 아이를 왕따로 만들었다 등
교사를 신고한 자폐성장애학생 어머니를 향한 공격 일색이다.
신뢰는 강요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고, 신뢰를 갖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눈에 띄는 내용은 장애학생이 왜 특수학급에 안가고 일반학급을 오냐는 댓글이었다.
문득 답을 쓰고 싶어졌다.
그 이유는 UN CRPD(유엔 장애인권리협약) 교육 분야 기준에 의해서이다.
장애학생을 비장애학생 교육환경에 통합하도록 하고 있다.
설마 요즘 시대에 모르실 리는 없을거라 생각하는데, 혹시 모른다면 정보의 업데이트와 전환이 필요하다.
통합학급 운영은 일반교사와 특수교사가 함께 교육해야 하는데 이 사건은 국내 통합학급은 일반교사 혼자서 모든 교육을 담당하는 사례가 대부분인 데다 특수교육대상학생의 교육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특수교육 지원체계 미비로 발생한 사안이다.
한국의 특수교사는 일반학교 특수학급에서 대부분 수업을 한다.
아이가 특수교사 없이 일반학급(통합학급)에 배치된 상태에서 필요한 교육적 지원을 못한 것은 오히려 교육권 침해와 방치의 위험이 있는 상태였다고 봐야 한다. 즉, 통합학급에서 발생한 문제를 특수학급으로 분리조치한 것이 문제고, 특수교사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도 문제이며, 그렇게 통합학급 운영 체계를 미비하게 운영한 것(특수교사 확대 배치, 운영 방식 구체화 등의 지원 없음)이 원인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안을 책임자가 해결하지 않고 부모와 교사의 대립, 아동인권과 교권의 대립, 부모단체와 교원단체의 대립, 비장애와 장애의 대립과 혐오 구도로 만든 사안이다. 특수학급을 벌을 주는 공간으로 간주할 경우 그 교실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그 학생이 정의되는 위험이 생긴다. 또한 그러한 조치는 실수 교정의 기회가 아니라 정체성의 오염으로 아이의 실수를 박제하는 낙인이 된다. 자숙의 이름으로 포장된 공포, 격리, 회복을 가장한 표찰이다.
우울 상태에 빠지면 생기는 사고 패턴 중 대표적인 것이 당위적 사고와 이분법적 사고라고 하는데 선입견이 강해지고 사고전환이 어려워지면 사안을 이분법으로 단순하게 바라보게 된다. 00초 교권 보호 사안보다 1년 전 발생한 장애인 학대 사건의 피해 아동 가족에게 00초 사건의 감정을 치환시켜버린 상황, 장애인 극혐자들에게 대리만족하도록 타케팅한 언론의 몫이 컸다. 장애인 혐오를 부추기는 주체가 된지 모르는 분들은 애초에 누구에게 목소리를 냈어야 하는지 다시 돌아봐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치매 노인이 되었을 때, 배변실수 했다고 요양원 원장실에 가 있으라는 벌을 받으면 좋아할 당사자나 보호자가 어디있겠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목욕탕 탕 안에 며칠 전 배변 실수를 하신 할머니를 흉보는 젊은 아줌마들을 보며, 그런 모습을 원치 않으셨을 할머니의 심정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애석하게도 그러한 일은 노화의 과정에서 신체의 근력이 약해지고 괄약근 조절도 어려워서 발생하는 행동으로 아무도 원치 않지만 멀지 않은 우리의 미래일 수 있다. 노인이든 장애인이든 말할 수 없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장애인 학대 신고의무자가 부모에게 신고를 떠넘긴 것도 모자라 00초 사건에 기대어 아동학대 의심 교사를 교사들의 영웅으로 만든 가히 영화같은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다. 그것도 아동학대 피해자인 자폐성장애학생의 연예인 부모를 갑질 프레임 감정 분풀이로 활용하면서까지 학부모의 녹음기 사용 여부가 관건이 된 이 사안에 대해 취약계층에 대한 인권 사각을 보호하는 기준 마련을 위해 국민참여재판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이 사건으로 매체에 계속해서 장애학생이면 특수학급 가지, 왜 장애학생이 일반학급을 오냐는 댓글이 달리는 현상을 보며, 나도 모를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보지 못하는 인간관이 개탄스럽지만 이 일을 계기로 앞으로 통합교육 운영 방안이 좀더 세밀하게 구축되기를 바란다. 나도 한때 특수교사였지만, 특수교사라는 직업이 신성의 영역은 아니다.
학생시절 교수님이 너희들 등에 천사의 날개가 퇴화된 흔적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었다.
과거 특수교육과에 진학한 이유로 소명의식과 사명감, 가족이나 사돈의 팔촌이 장애인이라서, 봉사를 하다가 천직이라고 생각해서, 전인교육을 위해 입학한 현역과 대학을 두번째 입학한 형, 직장을 다니다 입학한 언니, 수녀님, 스님, 청각장애인 선배, 시각장애인 선배 등 참 다양했다.
하지만 지금은 직업이 좋아서 특수교육과에 왔다고 하는 학생이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특수교사를 사명감과 봉사정신으로 표현하지도 말라고 한다. 그냥 여러 직업 중 하나의 직업을 선택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애의 정도에 따라 학생 수용도가 달라져서는 안된다.
특수교육도 통합교육도 철학 없이 실행하기 힘들다.
장애인 자녀를 키워보지 않고서 그 부모의 심정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저경력 특수교사 시절 어린 자녀를 둔 장애학생 부모님에게 "왜 제가 알려드린 대로 열심히 가정 연계 지도를 하지 않으시는지" 강요(push)했던 철없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 첫아이 신생아일 때 아파서 병원에 입원시켜 두고 조리원으로 가면서, 둘째 아이 기관지염으로 입원시켰을 때에서야 잠시 아픈 아이를 보는 마음이 이러할진데, 평생을 마음 쓰실 장애학생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후회과 죄책감을 느꼈었다. 그래서 부모교육을 가서 간혹 아이들이 과제를 수행해야 할 때 꾀를 부리거나 하기 싫다고 하면 교사는 교육의 일관성으로 규칙적으로 교육하지만, 아이들의 마지막 보루인 엄마는 아이들의 반창고이기에 때로는 자녀가 무언가 하기 싫다고 거부하거나 게으름을 피워도 유일하게 아이가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니 가끔 허용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린다.
자폐성장애인의 특성을 모르는 언론인들은 사과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만약 내 자녀였다면’ 이라는 전제로 보면 어른들이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었다.
장애아동 학대 신고 사건을 돌이킬 수 있었는데 부모가 자식의 모든 인간관계를 끊었다고 기사화된 것을 보고 한국의 언론이 자폐성장애학생에게 이토록 편파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아함을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단체는 미움은 미움으로 돌아온다고 쓰다니... 신고한 부모가 미워서 아이를 미워한다는 논리인데, 이런 악담이 한국 교육의 수준이라는 점이 믿기 힘들 정도이다. 세상에 내 입맛에 맞는 자녀도 학생도 없다.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에게 정서 관리를 지도해야 하고, 문제행동의 지도 목표는 예방이 우선이다.
애초에 누구를 미워했던가. 00초 사건의 실마리는 풀지도 못한 채 화풀이 대상이 누가 되었었는가. 처음부터 의문은 누구에게 향했어야 했고, 당시 그 미움이 누구에게 향해 있었는가.
초등학교 1-2학년 담임은 경륜이 많은 고경력 교사를 주로 배치하여 운영한다. 처음 학교 생활을 시작한 자녀를 둔 부모가 안심하고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하는 노련한 조치이다.
부모에게 믿음과 신뢰가 없었다고 판단하며 부부가 아이를 위해 도대체 무엇을 지켰냐는 질문을 하기 전에교육전문가가 포진된 학교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부모에게 도대체 무엇을 안내하고 지켰는지 질문하고 싶다.
이것은 통합교육 시스템을 논하기 전에, 학교 운영 시스템의 부재를 드러낸다.
얼마전 나는 30여년을 몸 담은 교원단체를 탈퇴하였다.
부모와 교사가 사과하고 용서하며 서로 꼭 껴안고 화해하는 장면
그런 결말을 꿈꾸는 내가 너무 순진한걸까, 이상적인 걸까.
다시한번 나에게 질문한다 .
내가 치매 노인이 되었다고 가정해 본다.
배변 실수를 하는 나를 벌 준다고 요양원 원장실에 데리고 가면 기분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