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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의 와트니

트리운드 조난까지 18일 전

by 코르테오

영화로도 유명한 소설 '마션'의 첫 문장은 주인공 마크 와트니의 말로 시작한다.


아무래도 X 됐다.

그것이 내 심사숙고해서 끝에 내린 내 결론이다.

나는 X 됐다.

-마션-


와트니가 화성에서 조난했을 때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문장이다. 우주비행사라는 직업은 많은 준비를 해야 하고, 극히 낮은 확률의 사고도 예방하기 위해 철저히 자기 검수를 한다. 하지만 와트니는 예측 불가능의 영역을 뛰어넘어 화성에 홀로 조난한다. 설마가 사람 잡는 그런 상황일 때, 일반적인 사람은 말문이 막히고, 도저히 생각이라는 활동을 할 수가 없다. 몇 번의 주마등이 스쳐 가고, 지금의 상황을 재조립해도 준비를 열심히 하고, 사고 예방에 힘쓴 그의 상황이 말이 안 될 뿐이다. 와트니 같은 상황이 내가 델리에 도착하고 출국장으로 나왔을 때와 같았다. 준비가 허사가 되는 상황이었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인도 여행 카페에서 정보를 취합하고, 픽업이 되는 호텔을 알아보고, 팁으로 줄 돈도 갖췄다. 연착이 자주 된다는 인도행 비행기도 정시에 떠나니 마음 편히 비행을 즐길 수 있었다. 출국장에 나서기 전 화장실에 들러서 혹시 모를 소매치기 대비도 다 갖추고 문을 나섰다. 그런데 나를 기다리는 픽업 기사가 없었다.


물론 도착 시간이 예상보다는 많이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내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없는 건 생각 못 했다. 그래서 출국장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는데 경비원이 막아섰다. 한 번 나오면 절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공항 규칙 때문이었다. 여행 시작부터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도 못 잡았다.


정신을 추스르고 숙소까지 가는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가진 돈은 모두 달러여서 루피로 환전해야 하는데 환전소는 공항 내부에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어떻게 돈을 구한다고 해도 숙소에 대한 정보가 핸드폰과 서류로 알려줘야 하는데 인도 심카드도 없고, 영어를 아는 인도인도 적었다. 대중교통으로 숙소에 가고 싶어도 너무 멀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달러 쓸 수밖에 없나? 싶을 때 앞에 플래카드를 들고 있던 인도 현지인이 나를 불렀다. 네가 찾는 기사가 어디 호텔이냐고 물었다. 나는 내 숙소 이름을 알려주니 그가 어디론가 전화하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콜택시를 잡아주고 돈 뜯기는 거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내 걱정도 무색하게 누군가 내게 달려오는 것이었다. 픽업 기사가 부리나케 달려와서 내 이름을 불러주자 크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1시간 동안 공항에 조난했던 나는 겨우 구조를 받을 수 있었다.


픽업 기사의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가 왜 나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비행기가 예상 도착시간보다 너무 늦게 와서 차에서 자느라 못 왔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듣고 나니 화가 났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인 걸 이해했다. 결과적으로 계획대로 숙소까지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니 주변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 위반을 밥 먹듯이 하는 차, 구름인지 매연인지 알 수 없는 하늘, 길거리에 배회하는 소와 아이들 등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인도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앞으로의 45일이 기대보다는 걱정이 커졌다. 첫날부터 예상치 못했는데 나는 잘 버틸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며 차창 바깥을 보니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지배인이 환한 미소로 날 맞이해 줬다. 예상보다 너무 늦게 와서 걱정했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쭉 풀어주니 그도 많이 놀랐고, 위로해 줬다. 배정이 된 방에 가서 짐을 풀며 내일 무엇을 할지 노트북과 책을 보며 고민했다. 또 이런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더 심혈을 기울였다.


돌이켜보면 이날은 내게 큰 교훈 두 가지를 줬다. 첫 번째는 나는 그런 상황을 여유롭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픽업 기사가 오기 전까지 나는 아무것도 하질 않았고, 발조차도 떼지 않았었다. 멈춰버린 사고에 행동도 묶여버린 것이다. 여러 대안이 있었지만, 돈이 아깝거나, 움직이기 싫다는 이유로 제자리에서 동동거리기만 했다. 때로는 그런 예측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다른 대안을 시도해야 했다.


두 번째는 여행 첫날 경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인지하니 이후의 여행에서 그런 상황이 나왔을 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일 이후 산에서 조난했을 때, 내가 이런 사고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또 산 중턱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국인 한 명이 인도에서 조난한 뉴스가 나왔겠지만, 다행히 그런 비보는 나오지 않았던 건 경험 덕분이었다.


하루 종일 많은 일을 겪다 보니 허기가 져서 숙소를 나와 저녁을 먹었다. 3층 테라스에서 저녁을 먹으며 파하르간지의 모습을 바라봤다. 카오스. 혼돈이 가득 찬 인도의 밤을 바라보며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앞으로도 이런 예측할 수 없음을 겪어야 하는 게 걱정이 되면서도 재밌을 것 같았다. 인도 델리에 어렵게 입성한 한국의 와트니는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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