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 현실주의다?
질문에 대한 답변
내가 ‘행복론’을 이야기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현실주의’라고 하니까 당장 통영에서 활동하는 홍모 박사가 이의를 제기한다. 그와 나눈 몇 마디 이야기를 소개한다.
“아리스토텔레씌의 행복관이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최고의 행복을 logos 적 삶이라고 보았는데…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 질문합니다.”
“현실주의지요. 나중에 삼천포로 빠졌지만.”
“삼천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 아닐까요? 개체 대 형상 우위. 갈팡 질팡 한 것 때문인 것 같아요?”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의 철학적 의도를 생각한다면 현실주의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야기는 메신저로 간단히 하고 내가 밖에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내가 좀 더 답변을 해야 하고, 또 중요하기도 한 문제이기도 하다. 어제 술을 먹고 들어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2시 조금 못 미쳐 눈이 떠져서 몇 자 적으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공부를 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플라톤이 죽자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 역시 이 아카데미아를 떠났다. 그의 철학은 스승 플라톤을 여러 사상을 부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무엇보다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한다. 플라톤은 현실과 현상(phenomenon)을 불완전한 그림자로 보고, 그에 대한 대비로서 완전한 존재로서의 ‘이데아’(Idea)를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인간 영혼은 이 완전한 세계에 거주했다가 이 세상에 탄생하러 오는 도중에 망각의 강물(Lethe)을 마시면서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지식은 잃어버린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상기(anamnesis)하는 것이다. 그에게 현상과 이데아는 전혀 다른 세계이고, 현상은 이데아라는 존재근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림자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 설령 완전자로서의 이데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 세계 속에 보편자로서 존재하는데, 이 보편자가 개별자를 그것이겠금 해준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의 제 1 실체와 제 2실체가 등장한다. 이야기가 좀 어려워지니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제 1 실체는 항상 문장의 주어가 되는, 우리가 지시하는 개별적 존재자들이다. “이 말은 하얗다”는 명제에서 이 말이 제 1 실체이고, 그것의 단면을 표현해주는 ’하얗다‘가 속성이고 보편자, 즉 제 2 실체이다. 제 1 실체는 가변적인 존재이지만, 제 2 실체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처럼 완전한 존재이다. 다만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달리, 보편자는 현실 속에 언어와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형상‘(Eidos)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가 쓸 데 없이 세계를 2원화했고, 또 불변하는 이데아는 가변적인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결국 그의 비판의 요지는 Idea와 달리 Eidos로서의 보편자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지만 요점은 질문에서 제기했듯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 현실주의인가를 밝히기 위해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다른 세계‘가 아니라 철저히 ’이 세계‘를 설명하고 근거짓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었다. 그가 말하는 에이도스, 형상은 이 세계 속에 내재하는 보편자이고 또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산물일 뿐이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느냐와 이 세계에 존재하느냐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이 형상론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주의로 복귀한다고 비판하는 이론들(예를 들면 한국에 번역돼서 많이 읽히는 <서양철학사>의 자자인 Hirshberger가 그렇다.)이 있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이데아와 에이도스의 차이를 무시한 것일 뿐이다. 이런 현실주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을 이야기할 때도 그대로 드러난다. 앞선 포스팅에서 이야기를 했듯,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필요 조건으로서 용모와 건강, 돈과 친구등 통상 사회 생활을 할 때 요구하는 조건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현실지향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는 행복의 필요조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면서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충분한‘ 행복의 조건을, 인간이 추구하는 ‘인간적’ 행복이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인간적 행복’을 따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인간의 고유한 본질(덕)인가의 문제를 밝혀야 한다. 인간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냐에 따라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을 동물이나 식물처럼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고, 먹고 마시고 재생산하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단편적인 설명일 뿐이다. 인간은 다른 동식물들과 다르게 생존을 위한 기능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존재, 홍박사도 지적했듯 logos를 사용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인간만의 지성을 가지고 사유하는 존재에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이 로고스 때문에 단순한 현실적 행복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이야기한 것이고, 그래서 삼천포로 빠졌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 보통의 사람들은 신체나 건강, 부와 친구들과 같은 행복의 필요 조건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인간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은 그것 너머의 것, 다시 말해 생각하는 정신적 활동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았고, 그런 의미에서 철학자가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다소 엉뚱한 논리로 나아간 것이다. 하지만 로고스 활동에서 행복의 충분 조건을 찾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은 논리적으로 어긋남이 없다. 다만 일반인들의 기대와 다르기 때문에 ‘삼천포’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로고스는 형이상학에서 이데아론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에이도스(형상)론 처럼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 있는 것이고, 신의 활동이 아니라 지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활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삼천포로 빠졌다는 의미와 상관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현실주의라고 말한 것이다. 이때 이 ‘현실’의 의미는 어느 정도 포괄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홍박사님, 이렇게 설명을 하면 납득하실라요? 물론 그렇지 않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묻고 따지고 생각하는 로고스의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 고유의 지성적 활동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