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철학은 대단히 상식적이면서 합리적이다. 대상을 인식할 때 단순히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한다는 것, 능동적인 것은 인식의 아프리오리한 틀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 이런 선험적 틀로 인해 인식은 인간적 (주관적)으로 이루어지는 동시에 그 한계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대단히 상식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을 연역하는 일과 인식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칸트 철학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두 계기이다.
헤겔은 칸트의 이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전략을 실천적으로 너무 쉽게 무너뜨린다. 인식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은 지는 직접 경험을 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헤겔이 예를 들듯, 내가 수영을 할 수 있을지 물 밖에서 백날을 따져도 알 수가 없고 오로지 물 속에 뛰어 들어 허우적 거려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이런 비유 역시 대단히 상식적이고 설득력도 있다.
한쪽에서는 가능성의 조건 때문이라 하고, 다른 쪽에서 그런 조건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경험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헤겔은 종종 간단한 비유를 들어 상대를 무력화하는 방식을 잘 쓴다. <정신현상학>의 '감각적 확신' 장에서도 비슷한 비유를 한다. 감각적 확신은 직접 경험이야말로 가장 풍부하고 가장 확실한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의식이다. 말하자면 개념의 추상을 거치지 않은 직접지야말로 가장 풍부한 지라는 것이다.
“최초에 또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감각 대상이 되는 지知는 그 자체가 직접적인 지, 직접적인 것 또는 존재자에 관한 지 이외에 다른 것을 수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또는 수용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자기 스스로를 제공하는 바대로 그것에 아무런 변경도 가하지 말아야 하고 또 그것을 포착할 때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을 자제해야만 한다.”(『정신현상학』, 93쪽)
감각적 확신은 여기서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것’을 칸트의 시공간의 형식과 마찬가지로 존재를 규정하는 두 가지 형태인 ‘지금’과 ‘여기’에서 본다면 다시 지금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이어진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지금’은 낮이라고 답한다. 이 감각적 확신의 진리를 검사하기 위해 ‘지금’은 낮이라는 것을 종이에 적어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낮인 ‘지금’이 진리임을 가리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한 참 시간이 지나서 다시 ‘지금’은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그때는 ‘지금’은 밤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내용이 달라졌다. 이제 ‘지금’은 낮이 아니라 밤이기 때문에 ‘지금’은 밤이라는 말이 ‘지금’을 표현하는 진리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이지 어떻게 ‘지금’이 낮이 되고, 또 밤이 될 수 있는가? ‘지금’은 하나의 진리로서 보존되어 있지만, 그것은 무수히 많은 낮과 밤이 아닌 것으로서만 보존된다. 따라서 ‘지금’은 밤과 낮이 아닌 것, 그 모든 것이 아닌 것, 개별적인 것들에 무관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보편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진리는 특수자가 아니라 보편자라는 것이 감각적 확신이 경험한 진리이다. 똑같은 변증법이 또 다른 규정인 ‘여기’와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나는 누구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나는 사라진다. 이러한 변화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는 나는 그 모든 것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나’이다. 이 ‘나’라는 말이 보편자이고 매개된 것이다.
헤겔은 여기서 『정신현상학』전체를 통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언어’의 문제를 강조한다. 우리는 감각적 확신의 진리가 ‘보편자’라고 말하지만(sprechen), 이 말은 구체적인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아닌 것, 즉 보편자로서 말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관적으로 사념한(meinen) 것을 언어가 표현할 수는 없다. 언어는 언제나 우리의 사념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 언어야말로 진실이다. 언어는 개별적인 사념과 달리 보편 개념만을 사용한다. 만일 우리가 각각의 사념을 드러내는 사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서로 소통을 할 수가 없다. 만약 타인과 소통하고자 한다면 보편 개념으로서의 언어를 인정하고, 언어가 사용되는 규칙과 문법을 따라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감각적 확신의 변증법은 가장 내밀한 사념이 가장 풍부하고 진실된 것이라는 생각이 사실은 가장 빈곤하고 가장 진실과 거리가 먼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헤겔은 언어의 이러한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재밌는 예를 든다:
“감각적 대상의 실재성이라는 진리와 확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감각적 확신은 … 케레스Ceres와 바쿠스Bacchus라는 고대 엘레시우스의 신비 의식으로 되돌아가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일의 비밀을 이제 비로서 배워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밀을 엿본 사람들은 감각적인 사물의 존재를 의심(Zweifel)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절망(Verzweiflung)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편으로 그러한 사물들에서 허망함을 보고,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사물들이 그에게 가져오는 허망함을 본다. 짐승들 역시 이러한 지혜로부터 배제되기는 커녕 오히려 가장 깊숙이 그 진리를 체득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짐승들은 감각적 사물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양 그것들을 그대로 내 버려두지 않고…그것들을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정신현상학』, 104-105 쪽)
칸트와 헤겔의 이런 전략의 차이를 한국 철학의 현실에 적용해보면 그 차이를 바로 알 수 있다. 한국의 철학계가 지난 수십년 동안 가져 왔던 화두는 "우리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 였다. 이런 화두를 중심으로 우리 철학의 정체성을 따지고,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방법을 모색하고,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가능성의 조건을 둘러싸고 논쟁을 수도 없이 많이 해왔다. 하지만 그렇게 수십년이 지났어도 우리 철학의 논의는 처음 제기된 화두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어떻게 할 것인가?'에 머물러 있다. 때문에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이 한국철학은 부재한 상태에서 오파상이니 고물상이니 하는 자책만 되풀이 하고 있다. 이런 논의를 보면 조선이 일제 식민지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논쟁을 백날을 해도 식민지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사상과 문화 투쟁, 그리고 무장 투쟁등 다양한 방식의 투쟁을 전개하면서 식민지 현실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마디로 삽질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오늘 날 한국철학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방의 모 대학에서 이달 말 <21세기형 우리 철학 정립의 토대와 방향>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대대적인 심포지움을 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칸트냐 헤겔이냐?'라는 생각이 들어 몇 자 적어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