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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Jul 16. 2024

강원도 여행기


1. 대학 시절부터 만나왔던 모 써클의 오비 멤버 4명이 갑자기 강원도 여행을 하게 된 것은 첫번째는 K형의 제안이었고 (이에 관해 이미 K형과 P형 간에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두 분은 나보다 3년 선배다), 두 번째는 Y형의 급작스런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 Y형은 그동안 적지 않은 기간 동안 병 치레를 했지만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친한 K형이 C 형이 돌아가시기 전에 여러 채널로 연락을 취해 보려 했지만 연락이 닿지 못한 아쉬움이 큰 탓도 있었다. 아무튼 그날 장례식 장에 온 몇 몇 사람들을 중심으로 함께 강원도 1박 2일 여행 이야기가 나와서 장마 철 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되는 4명이 함께 여행을 간 것이다. 다행히 비를 피해서 다닌 탓에 오가는 길에 비 때문에 고생을 한 것은 없었다. 


이번 여행은 P형 이 모는 큰 차를 타고 비교적 편안하게 다녔다. 여행을 할 때 주로 내가 운전을 했기 때문에 여행이 끝나고 나면 피곤했었는 데 반해, 이번 여행은 솔직히 입만 가지고 다녀서 즐거웠고 피곤하지 않았다. 가는 길에 일부러 강원도 깊숙한 산골에 위치한 원조 막국수 집을 들른 것이 좋았다. 속초에 도착하자 마자 P형이 예약해둔 <The K 설악산 가족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바로 나와 고성 쪽의 거진 항으로 갔다. 이곳은 낚시와 수산물을 워낙 좋아하는 P형이 단골로 이용하는 포구라고 했다. 거진 항은 나 역시 가족을 데리고 몇 번 왔었던 곳이라 익숙한 곳이다. 서울은 폭우로 고생을 한다고 하는 데 우리 가는 길은 보슬비만 내려서 오히려 여름날 땡볕에 운전하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항구에는 비가 내리는 데도 낚시 꾼들이 낚시대들을 바다에 내리고 있었다. P형 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면서 함께 낚시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직접 하지는 않았다. L군과 P형이 함께 포구를 돌아 다닐 때 나와 K형은 여러가지 학문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차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일전에 K형이 내 글에 관심을 보인 적도 있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과학도인 형의 인문학적인 독서와 내공이 깊어 보였다. 특히 <위험사회>를 쓴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과 만나서 사진도 찍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랬다. 형은 현대 사회가 위험(risks)이 도처에 산재해 있고, 이러한 위험이 삶에 큰 영향을 주는 데 반해 그것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심리는 각기 다르다고 말했다. 처음 들어보는 '위험 심리학'(Risk Psychology)은 그런 서로 다른 심리의 차이가 무엇이고 왜 그런 가에 대한 사회 문화 역사 개인 등의 광범한 원인을 밝히고 동시에 위험을 관리하고 대처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싶어하는 학문 분야라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함께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자고 했다. 가능하면 함께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 나의 심정이었다. 


2. 대포항에 들어가서 P형이 단골로 거래하는 횟집 사장 주인인 경미엄마한테 가서 익숙하게 이것 저것 횟감을 사서 즉석에서 매운탕 거리와 함께 구입을 했다. 횟감을 사고 그것을 호텔로 가서 바로 먹을 수 있게끔 잘 뜨는데 거진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그것을 기다리면서 이곳 저곳 횟집 구경을 많이 했다. 횟감을 싸들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속초 시내의 이마트에 들러서 소주와 맥주 그리고 햇반과 기타 술 마시는 데 필요한 것들을 사다가 내가 스틱을 카트에 놓고 내리는 실수를 했다. 나중에 찾아 달라는 방송을 부탁했지만 결국 찾지는 못했다. 나이를 먹을 수록 조심을 해도 이런 실수는 불가피한 것 같다. 스틱이 없어도 당장 큰 어려움은 없다. 호텔로 돌아오자 마자 수십년 동안의 캠핑 경험을 갖고 있는 L군이 요리를 준비하고 가져온 매운탕 거리로 매운탕을 끓였다. 노장 한 팀이 이렇게 설악산까지 와서 맛있는 횟감을 놓고 술을 마시기는 처음이다. 내가 P형 하고는 간간히 대화를 나눠보았지만 K형 하고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지를 못했다. 오래 전 대학 1학년 겨울에 내가 혼자서 무전 여행을 할 때 광주에 살던 K형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때 형이 나를 무척 환대해서 금남로 술집에서 술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경험이 있었다. 다음 날 집을 떠날 때는 그 당시 돈으로 2천원을 손에 쥐어 주던 좋은 기억도 있다. 형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서 자신의 인간성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리 만무라고 겸손해 했지만 그 일은 내 머릿 속에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무튼 이제 다들 머리에 흰 서리가 잔뜩 내린 노장 세대가 된 우리가 이렇게 여행지의 숙소에서 술을 마시기는 처음이다. 안주 감도 좋았지만 이 술자리의 백미는 술 마시면서 나누는 심야 정담이었다.


3. K 형은 이 술을 마시면서 자기가 생각해둔 세 가지 제안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이 술자리를 최근에 돌아가신 Y 형을 추모하는 자리로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는 자주는 못 보았어도 젊은 시절부터 수 십 년의 관계를 맺어 오던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에게 Y 형의 죽음은 이제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현실감과 함께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이런 Y 형을 추모하자는 이야기에 우리는 첫 잔을 함께 들고 비록 이 자리에 함께 있지 않은 Y 형의 잔에도 하나 채워 놓았다. 늘 환하게 웃으면서 K 형이 썼던 추모시의 표현대로 "그런데 형 말이에요. 이거 하나 물어봅시다."라고 하는 Y 형이 이 자리에 함께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한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와 함께 하기도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장애'라는 상처를 갖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특별히 기억할만한 개인적인 일화를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이 써클은 지체 부자유 대학생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었고, 우리 모두 '장애' 문제로 평생 고생을 해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할 말이 좀 있다. 잘 알다시피 1976년 **대에서 신체검사 후 대거 15명을 불합격 시킨 사건이 있었다. 나 역시 그런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때 신체 검사를 받을 때 팬티만 입고 긴 책상 위에 올라가 있었고, 의대의 교수와 인턴 레지던트 등 5-6명이 내 몸을 관찰하면서 이곳 저곳을 눌러보던 치욕적인 경험을 했었다. 함께 검사를 받던 치대의 다른 친구는 검사 대 위에서 엉엉 울기도 했다. 해부대 위의 실험용 개구리나 다름 없는 모욕적인 취급을 받으면서 너무나 분노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거진 50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 때 그 경험은 정말로 하나의 트라우마 처럼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유명해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그 중 하나는 ** 대에게서 그 때의 반 인권적 처사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싶다는 생각도 크다. 나의 심정은 수 십 년 전 일본 군의 만행에 대해 금전이 아니라 일본이란 나라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싶다고 일본 대사관 앞에서 오랫동안 시위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런 비 인간적 신체 검사를 받고 결국은 2차 시험 기간을 넘긴 후에 불합격까지 당했으니 그 억울함은 정말 말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이 사건을 규탄하는 정립 회관에서의 시위를 보고 청와대의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 해결을 해주었다. 엄혹한 유신 치하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충분히 박 대통령의 휴머니즘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우리 모두 **대에 입학을 했지만 정원 외 입학인 반면, **대는 오히려 정원 외 입학생을 빋아들이는 헤택을 입은 셈이다. 책임을 져야 할 대학이 오히려 잘못을 저지르고서도 혜택을 받는 이런 현실에 대해 ** 대학은 반드시 해명과 사과를 해야 한다고 본다. 그 사건을 겪은 후 범생이 같았던 내가 결심한 것이 있었다. "이제 나는 다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욕망을 따르지 않겠다" 내가 법대를 들어갔어도 사법 시험 1차 시험도 보지 않고 좌충 우돌 방황을 수도 없이 했고, 그 이후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순탄한 삶을 살지 않은 데는 이 때의 충격적인 경험이 컸다. 이 사건은 나의 인생의 행로를 바꿔줄 만큼 개인적으로 큰 의미를 띠고 있었다. 


4. 늘 기개와 기백이 넘치는 P 형 역시 장애 등급 판정 문제로 병원에서 팬티만 입고 여러 명의 의료진들 앞에서 검사 받았을 때의 치욕적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면 반 인권적이고 비 인간적인 이런 검사는 과거 우리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경험했던 일이기도 했다. 매사에 늘 자신감이 있고 적극적인 동기 L 군은 특별히 장애 문제로 고민해보거나 불이익을 받은 경험이 없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뛰어난 친구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당시 국립 서울대에서는 이런 사건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수 십 년 동안 그에게 품었던 질문, 하지만 그의 프라이버시에 관련된 것이라 묻지 않았던 질문을 그의 동의를 받아서 했다. 과거 이 종준이 어떤 사건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 갔던 이야기다. 그는 큰 사건을 치뤘음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천연덕스럽게 큐빗을 맞추고만 있었다. 늘 오만할 정도로 자신 만만했던 그가 실연 사건 정도로 목숨을 던지려 했다는 것이 나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실연 사건이 있었지만 왜 그런 행동을 했는 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만 그 일이 벌어지기 며칠 전부터 몽유병 증상이 있었다고 한다. 사랑의 상실감이 크다 보니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일 이후 정상적으로 대학원을 졸업했고 직장 생활을 잘 보냈다. 정년 퇴직한 후로는 자연 건강원을 설립해서 천연의 가습기를 개발하고 오가피 등 천연 약재로 만든 건강 식품 판매를 하고 있다. 끝으로 종석 형 자신은 제안만 할 뿐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제안은 이런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 날 점심 먹을 때 나온 이야기다. K 형 왈, 이제 우리에게 '죽음'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다. 노화 외에도 돌발적인 사고나 사건으로 인해 죽음은 얼마든지 우리 삶을 위협할 수 있고, 특히 포스트 장애인증을 겪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문제에 더 예민하게 노출될 수 있다. 나이를 먹을 수록 오랜 동료들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고독 사와 같은 말을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일상 경험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립단의 친구들끼리 서로 간의 삶을 이어주는 끈이자 보루 역할을 해줄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 제안이 과거의 사건들과 관련된 것인데 반해 이 세 번 째 제안은 현재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현실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나눈 이야기 결과 이제 우리가 좀 더 자주 관계를 갖고 만남의 자리를 갖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듯, 그런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자주 소통과 교류를 하는 것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K형은 따로 준비해온 원고까지 참조해가며 인간의 사회성과 개인성에 대해 역설했다. 인간은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이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 이런 개별성과 주체성에 충실할 때 비로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 타인의 욕망과 상관없이 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때 인간 자신의 삶이 충실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타인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인간(人間)이란 한자 말도 서로 버텨 주고 사이 속에 살아가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인간은 고립되고 고독하게는 살 수가 없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사회성 역시 중요하다. K형은 이렇게 서로 상반된 개인성과 사회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물음을 던졌다. 나 나름으로는 이 둘은 상반되어 있기 보다는 형평과 조화에 바탕을 둔 균형의 문제로 생각한다. 주체성은 타인과 더불어 있을 때 드러나는 법이고, 사회성은 개인의 확고한 주체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이 둘의 관계를 적절히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과학도인 종석 형의 인문학적 성찰의 관심과 깊이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5. 밤이 깊어지고 술자리도 무르 익어지다 보니 수십년 전의 추억들이 마구 떠오른다. 그 중 하나가 대학 다닐 때 숱하게 오르 내렸던 한국 소아마비 협회 산하 <정립회관> 이야기다. 이 회관은 워커일 호텔 뒷편에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친구들을 사귀고 수영이나 탁구같은 운동도 하고 술도 많이 마셨다. 이곳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애로운 어머니같은 황연대 관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연대 입학 문제로 농성을 하고 그 후 대학 정립단이라는 지체 부자유 대학생 모임을 만들 수 있었던 데는 황연대 관장의 도움이 컸다. 황 관장은 소아마비를 알았지만 이화여대 의대를 졸업하고 재활 의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황관장은 일찍부터 소아마비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했던 깨인 의사였다. 그녀는 나중에 정립회관 장이 되었을 때 지체 부자유 학생들이 대학 진학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실을 알고 일일이 각 대학에 진학 여부를 문의하기도 했지만 당시 대학 당국자들은 이런 문의 자체를 묵살해 버렸다. 연세대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후 연세대 문제가 사회 문제로 이슈화될 수 있었던 것도 정립회관을 배경으로 황연대 관장이 적극 대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1988년 서울 하계 패럴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나중에 '오늘의 여성상' 시상식에서 받은 상금 전액을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에 기부하면서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가 '황연대 성취상'을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녀가 소아마비를 위시한 지체 부자유 학생들이 정상적인 학업과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대학 정립단이 이런 황 여사의 삶을 전혀 기록으로 남겨 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왜 그런 지에 대해서 이야기가 분분하지만, 회관 운영 상의 비리 문제도 있었고 사회 문제들에 대한 정립 단의 인식 부족 과 소극적인 태도 문제 등 여러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장애인 엘리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정립단이 장애인 문제를 사회적으로 개선하는 일에 거의 나서지 않았던 것은 두고 두고 후회할 일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이어짐)


6. 이 일을 위해서 먼저 70년대 오비팀들 중심으로 자리를 만들어보자고 P 형이 제안을 했다. 그래서 오비팀이 운영하는 단톡방을 만들고, 이 단톡 방의 멈버를 서서히 확충하는 과정에서 먼저 7월 말쯤 간단한 오프 라인 모임을 가져보자고 했다. 오비 모임은 기존 써클의 단톡방을 나누고 분열시키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존의 방에서 씨를 빼고는 오비 팀이 말을 꺼내기가 쉽지가 않다. 말 많은 나도 말을 하기가 힘든데 다른 멤버들은 더 그런 느낌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면 썰렁해지는 것 같아서 더 침묵하게 되는 감이 없지 않고, 80년대 이후 학번들의 수다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 경우들이 생긴다. 그래서 오비팀의 최소한의 발언과 관계를 맺기 위한 장으로 생각해주길 바란다. 혹시라도 다른 의견이 있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귀를 열어두기로 했다. 이런 취지로 단톡 방을 바로 만들고 이번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올려 놓았다. 앞으로 천천히 생각을 하면서 오비 팀 인원을 늘려갔으면 한다. 1박 2일 아주 짧은 여행이지만 수 십년 동안 마음 속에 응어리처럼 담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고령화 사회가 일상화되는 지금 우리 자신이 그런 경험을 겪고 있는 마당에 그것을 함께 성찰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6. 이틑 날에도 가랑비는 조금 내리고 있지만 오히려 쾌적했다. 호텔 조식을 마친 다음 함께 대포항 Ramada 호텔 근처의 전망대 구경을 하고 사진도 찍은 다음 상행 길에 올라섰다. 설악산 바로 밑의 원조 할머니 순두부 음심점에서 점심도 맛있게 먹었다. 서울이 가까워 짐에 따라 비도 많이 내리고 경춘 고속도로의 차도 많이 말리기는 했지만 노련한 운전자인 P 형 덕분에 아주 멋지고 좋은 여행을 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것에 대해 고맙고 즐거웠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을 정도다. (202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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