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반란이다>의 서문입니다. 학자들이 비판과 논쟁을 하지 않으니까 무속이 현실 정치를 좌우하고 쓰레기 종교인들이 혹세무민하는 것입니다. 논쟁과 비판은 학자들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입니다.
"서문을 대신하여 ; 왜 철학은 반란인가?"
철학은 다른 분과 학문들과는 다르게 문제를 근원적이고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높다. 때문에 철학은 끊임없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의 물음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수없이 철학 공부를 하면서 철학사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나름 전문화된 분과 철학에 주제를 한정해 열심히 탐구하면서도 과연 이것이 제대로 ‘철학을 하는’(philosophieren) 것인가라는 자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분과학문의 경우에는 이런 식의 질문이 거의 없다. 그들이 하는 일 대부분은 과학사가 토마스 쿤이 주장했듯, 주어진 패러다임(paradigm) 안에서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이들이 무언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경우는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에서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다. 이때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 방법에 대해 의문을 갖고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에 반해 철학은 이런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질문을 상시적으로 던진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늘 해오던 철학에서 얼마든지 제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철학의 참다운 본질이 무엇이고, 철학의 본래적인 정체성이 무엇이고, 철학은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철학자마다 다르고, 각 시대마다 다르고, 특정한 철학 분과마다 다르다. ‘철학’이란 말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없다.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말하는 ‘철학’은 결코 ‘단일한’(univocal) 의미가 아니라 유비적(analogical)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동서 철학과 고금의 철학의 차이와 다양성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때 철학은 결코 어떤 하나의 철학으로 한정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렇게 한정 지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철학의 전부는 아니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면서 필자는 “철학은 반란이다!”라는 주제로 지금까지 이곳저곳에 써왔던 글을 정리해 보았다.
이 책은 철학이 갖는 여러 가지 특성 중에서 다른 어떤 분과학문들 못지않게 철학의 비판적 특성을 살려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사실 동서양의 철학사를 통해서 볼 때 그것은 칼만 들지 않았지 사무라이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못지 않았다. 철학사는 언어로 싸운 전쟁터나 다름없다. 철학은 끊임없이 전대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철학을 탄생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하고 비판과 부정을 일상화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철학, 특히 서양철학은 이러한 비판과 부정의 역사, 즉 반란의 역사로 이어져 온 것이다. 서양철학의 탄생지라 할 그리스에서 그 모습을 여실히 찾아볼 수 있다. 초기 이오니아 지방의 자연철학자들은 우주 자연(Physis)의 궁극 원인(arche)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아르케는 시초이자 원리이고, 그 이후의 것들에 대한 영향력이기도 했다. 이 아르케를 둘러싸고 서양철학의 원조인 탈레스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한 반면, 아낙시만드로스는 그런 가시적인 것이 근원이 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만물의 근원은 무한자(apeiron)다.”라고 했다. 뒤이어 아낙시마네스는 추상적인 무한정자를 거부하고 ‘공기’를 아르케로 내세웠다. 이런 식의 논쟁은 그 이후 서양철학사의 전개를 통해 그대로 이어졌는데, 동양 철학의 역사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제자백가의 온갖 학설의 난무는 이러한 전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선사들은 깨달음을 구하는 과정에서 “부처가 보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보이면 조사를 죽여라.”(殺佛殺祖)라는 이야기까지 했다. 오로지 진리와 진실이 중요할 뿐 사람은 부차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논쟁과 비판들을 전개하면서 필자는 무엇보다 철학의 밑바탕에 흐르는 이런 철저한 비판의 정신을 따르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역사는 전 시대 혹은 바로 앞선 세대에 대한 비판과 반란의 역사다.
이런 철학의 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논쟁이 부재한 작금의 한국의 인문학과 철학의 현실은 참으로 초라해 보인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거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라는 말은 아마도 논쟁과 비판을 외면하고 기피하는 한국적 풍토를 대변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필자가 본문에서도 지적했듯, <제망매가>에 관한 이어령 선생의 해석은 참으로 문제가 많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 대해 수십 년이 흐르도록 누구 하나 제대로 비판하거나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어령 선생의 유명세에 주눅이 들어서 그랬다고 한다면 학자로서 참으로 비겁한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한때 장안의 지가(紙價)를 높인 신영복 선생의 글에도 적지 않은 문제들이 들어있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에 관한 선생의 해석은 이론과 실천의 문제를 부단히 사색한 데서 나온 정수이다. 하지만 선생의 의도와 다르게 이 해석은 정반대로 이루어졌다. 이어령 선생이 지나친 자신감과 자기 도취에서 오류를 범했다고 한다면, 신영복 선생은 독학으로 쌓은 학문의 부족과 경험추수주의의 한계에서 나온 오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오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오류에 대해 누구 하나 시비를 걸지 못하고 학문적 논쟁을 하지 못한 한국의 학계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오류들은 조금만 눈을 밝혀 본다면 도처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인문학과 철학이 늘 수입에 의존하고 자생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판과 논쟁의 부재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이 책이 비판과 반란의 정신이 부재하고 논쟁이 없는 한국의 철학계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