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비판하면서, 말씀 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한 말이 있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행동을 해야지만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있고, 이러한 변화가 새로운 행동을 요구하면서 무언가 일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행동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무엇을 했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명박이 말마따나 “내가 다 해봤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왕년에 내가 무엇을 했다는 식으로 과시하고 자랑을 한다. 그들은 어디를 가봤다, 무엇을 먹었다, 누구와 무슨 일을 했다 등등으로 자신들이 무엇을 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무엇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을 한다는 것은 동물도 똑 같이 한다. 동물이 말을 못 해서 그렇지 그들도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엇을 한다. 하지만 했다는 차원을 동물들은 넘어서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했다는 것만 강조한다면 과연 인간이 동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무엇을 했다”는 것 이상으로 그것을 기록하고 의미화하는 일이 더 인간적이고 의미가 있다고 본다. 언어를 통한 이런 의미화 작업이 비로소 ‘했다’고 하는 단일한 사건을 객관화하고 보편화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는 그 자체가 소통을 위한 객관적 수단이기 때문에,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만이 의미화 작업에 이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을 통해 인간들은 상호 소통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했다’는 것 이상으로 ‘의미화’가 중요하다. ‘의미화’가 없다면, ‘했다’는 것은 그것을 한 당사자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체험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이런 ‘의미화’ 작업은 오직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인간만이 할 수가 있고, 때문에 ‘의미화’야 말로 가장 인간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저 ‘했다’는 것만 강조할 뿐 그 이상으로 그것을 객관화하고 의미 부여하는 일은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랜 공직 생활이나 교육자로서의 생활, 특수한 분야에서 쌓았던 특수한 경험들에 대한 의미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그것들이 사장되는 경우들이 많다. 의미화가 이루어져야만이 타인들도 그 일의 의미를 인정하고 교류할 수 있다. 이런 의미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다 보니 아무리 좋은 ‘했다’도 그 개인의 사적 체험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사적 체험이나 개인적 경험을 벗어나지 못할 경우 그 좋은 ‘했다’도 타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고, 축적될 수도 없다. 그러면 발전이 있을 수 없다.
“태초의 행동이 있었다”는 괴테의 말은 행동이 무언가 변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말씀(Logos)에 의한 의미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아무것도 이룩할 수가 없다. 때문에 ‘의미화’는 ‘했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럼에도 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겪고 쌓은 ‘했다’에 의미화를 못하는가?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화’를 통해 그 ‘했다’의 정신을 나누고 지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이런 ‘의미화’의 연속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