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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양철학 편력기 4

동북아의 샤머니즘

by 이종철

내가 법대에 적응하지 못했을 때는 신학과에 여러 친구들이 있어서 그들 소개로 신과대학 수업에 많이 드나들었다. 그 당시 신과대에는 참으로 기라성같은 교수들이 차고도 넘쳤다. 한태동 교수의 전설 같은 강의, 풍류 신학을 주장하던 유동식 교수, 신학의 언어로 사회 현실을 비판하던 김찬국 교수, 한국 교회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던 민경배 교수 등이 지금도 선명하다. 또한 당시 문과대에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유명 교수들이 여럿 있었다. 사학과의 김용섭 교수, 영문과에서 셰익스피어에 관한 명강의를 하던 오화섭 교수, 교과서에서나 보던 청록파 시인 박두진 교수, 철학과의 배종호 교수 등 기라성 같은 선생들의 강의를 청강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법대 수업은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유동식 교수의 수업을 미션 학교의 필수 과목인 기독교 개론 수업에서 처음 대했다. 유교수는 첫 시간에 들어오자 마자 『장자』 제 1편 소요유에 나오는 북쪽 바다의 거대한 물고기 鯤(곤)과 이 곤이 변화해서 새로 모습을 가진 ‘鵬(붕)’이라는 새 이야기를 해주셨다. 선생은 그 새의 거대한 모습을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 당시는 그런 선생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그마한 것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큰물에서의 자유의 정신을 깨달아 보라는 의미였었던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강의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경우가 많은 데 유동식 교수가 강의에서 하던 몇 마디 말씀은 평생 기억에 남았다. 그분은 입속에서 발음하는 것도 약간 울렁거리는 식으로 독특한 인상을 주었다. 유동식 교수는 한국인의 의식의 기저에는 동북아의 샤마니즘이 잠재적인 무의식처럼 자리를 잡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이 거대한 샤마니즘의 용광로 속에 불교도 들어오고 유교도 들어오고 근세에는 기독교도 들어와서 융해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절간의 본당 뒷 편에 반드시 산신각을 모시는 경우나 기독교의 부흥회에서 보이는 거대한 불같은 열정들을 샤머니즘과 연관시켰다. 그것들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용해시키는 용광로나 다름없고, 이 용광로 안에서 외래 사상인 불교와 유교 기독교 등이 하나로 용해되어 한국적인 사상을 이루었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비빔밥이나 탕은 여러 가지 다른 재료들을 한 그릇 안에서 비벼서 독특한 맛을 낸다. 이 한 그릇이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것이다. 유동식 교수의 이 같은 생각은 그 이후로도 나의 머리속에 오랫동안 남아서 두고 두고 곱씹는 계기가 되었다.


유동식 교수의 이런 해석은 나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린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은 풍류도로 유명하다. 선생이 쓴 「난랑비(鸞郞碑)」의 서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것을 일러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곧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뭇 생명과 만나서 감화한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이 노(魯)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이요, 자연 그대로 일을 하면서도 말없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주(周)나라 주사(柱史)의 근본이요, 모든 악(惡)을 만들지 말고 모든 선(善)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축건 태자(竺乾太子: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三國史記』 (「新羅本紀」眞興王條) 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유불도 삼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현묘한 풍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풍류도에는 유불도 삼교와 소통할 수 있는 요소가 그대로 담겨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그것들을 하나로 용해할 수 있는 용광로이기도 하다. 동북아시아에 공통적인 바람의 에너지, 집단 무의식이라 할 수 있는 풍류가 밑바탕에 현묘한 도로 깔려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유명한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이란 표현이 나온다. 이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이 서로 만나고 소통(接化)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접속과 소통은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자 운동 방식이다. 오늘날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한류의 바람은 이러한 에너지에 기원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재현해야 할 동양철학의 정신은 유불도 3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용광로처럼 불바람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샤마니즘에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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