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관점에서 본 인간의 존재와 무기력증
나는 나를 포함한 관계들 속에서 내 책임과 의무를 하다며, 그 가운데서 내 자아의 성장을 위한 노력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즐거움을 경험하기 위해 살아간다.
앞서 네 번째 글에서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이번에도 행복을 이 이야기에서 제외하고 풀어내긴 어렵다.
현대 철학에서의 행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헤도니아(Hedonia, 쾌락적 행복)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자기실현적 행복)이다.
헤도니아는 우리가 즉각적이고 감각적으로 반응하며 얻는 즐거움을 말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재미있는 영화를 보거나 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개념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통해 잠재력을 실현하며 느끼는 충만감'을 의미한다.
난제를 해결했을 때의 성취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무언가에 깊게 몰입하는 경험, 타인이나 공동체에 기여하며 느끼는 보람 등이 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쾌락처럼 짜릿하지는 않다. 그러나 삶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행복의 원천이 된다.
에우다이모니아는 가벼운 마음으로 손쉽게 얻기 힘들다.
회사 밖에서의 나의 잠재력을 발굴해 내기 위한 글쓰기 활동을 통해 짧은 글을 완성할 때의 고양감을 통해 찾아오기도 하고,
굉장히 어려운 책을 끝까지 읽어내고 내 삶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행복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토론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도 즐겁다.
에우다이모니아는 무엇인가 거창한 성취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은 사색과 진솔한 관계적 교감을 통해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이런 경험들로 하루하루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심을 키우기보단, 활력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그냥 존재할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해야 할 일들을 해내면서 살아간다.
나의 실존에 대한 생각을 위대한 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리의 실존을 철학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았는지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생각을 언급해 보겠다.
인간은 신과 종교를 믿을 때 실존에 대한 커다란 의문을 갖지 못했다. 이미 신이 그렇게 점지했고, 그에 따라서 그저 살아갈 뿐이었다. 나의 존재를 의심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불경한 일이었다.
거대한 힘인 종교, 국가 아래서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주어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인간에게는 더 이상 종교와 국가가 절대적이지 않다.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인간은 진화를 거듭했지만 사회발전의 속도를 인간의 유전자를 빠르게 따라잡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스스로의 의미를 찾으라는 사회의 요구에 대응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실존주의 철학의 주요 철학자인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세상에 그저 '내던져진 존재'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과 행동의 결과에 따라 나의 본질을 만들어나갈 자유가 있다. 그리고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나의 선택에는 누구도 대신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율적인 선택의 결과물인 '나'라는 존재를 타인이 어떠한 잣대로도 쉽게 재단하지 못한다.
결국 살아갈 힘과 그 모든 책임은 오롯이 나 자신에게 있다.
개인은 원하는 것이 다르고 그 모든 게 충족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빅터 프랭클은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나치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모든 자유를 빼앗고 유대인 수용소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상황에 처하게 했다고 생각해 보자. 갑자기 가진 것을 잃는다는 상실감은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오고, 무기력증에 빠져 삶에 대한 의미를 찾기보다는 포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어도,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고 했다.
거대한 고통 앞에서 존엄성을 지키고 삶의 의미를 발견할 것인지, 절망에 굴복할 것인지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 속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반복적으로 나사만 조이는 주인공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그는 거대한 공장 시스템에서 하나의 부품일 뿐이다.
그의 노동은 자본가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지만, 정작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다.
공장 안에서 일하는 그들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지만, 고용주나 주변의 동료들은 아무런 의미도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의 현대적 풍경이다.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인간의 열망'과 '아무런 의미도 대답도 주지 않는 이성 없는 세상'사이의 충돌이자 간극이다.
1930년대의 모던타임스에 비유했지만 현대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반복노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단순반복의 노동이 아닐지라도 노동자로써 회사에서 일하며 생존하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카뮈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에게서 찾는다.
시시포스의 노력은 부조리하다. 매우 열심히 바위를 올려보지만 떨어지고야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 삶에 대한 반항을 자양분 삼아 계속해서 돌을 올린다.
정해진 운명이나 신의 섭리에 저항하는 행위 자체(과정)가 나의 존재를 증명해 내는 방법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삶, 매일의 책임, 매일의 관계'라는 바위의 무거움을 느끼고, 그 운명을 경멸하면서도 사랑하기로 선택할 때, 그 무의미해 보이는 노동은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의미'로 가득 찬다.
시시프스는 바위를 올리기로 선택했듯,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충실할 때, 나의 부조리한 삶에 대해 반항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증명하고 '나의 자아'의 의미를 찾아낸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통찰을 돌아보면 모두 한 가지 생각을 표현한다.
[나의 의미는, 나의 모든 것은, 나의 의지이자 선택의 결과물이다.]
인간은 나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전부는 '나'이다. 다른 누가 내 삶을 살아주지 않는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내게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결국, 나라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
인간은 나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사느라 바빠서 나를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한다.
카뮈의 시시포스가 돌을 밀어 올리기를 '선택'했듯, 나 또한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글쓰기를 '선택'했다.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나의 본질을 확인하고 만들어내는 노력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무기력증에 빠지고 마는 것일까.
현대인들은 과거의 농경사회에 비해서 더 바쁘게 생활한다.
더 많은 노동을 하고, 더 많은 지식을 얻고, 더 많은 것을 소비한다.
이것들이 인간을 지치게 하는 것일까?
더 많은 활동과 소비가 인간을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현대인의 무기력증은 비교를 하는데서 찾아온다.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왠지 게으르고, 사회에서 도태된다는 무언의 압박에 시달린다.
과거의 인간에 비해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나 성취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
개인의 사회에서의 성취는 철저히 '나'의 능력의 결과물이라고 생각된다.
설령 나의 성취가 나의 노력과 관계없이 운의 영역에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결과물만 보인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평가를 받고, 평가를 한다.
이런 서로 감시하고 평가하고 비교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기력증에 걸리기 쉽다.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더 이상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상황이 안 좋아지는 현실을 경험하면 정신적으로 무너진다.
'세상은 당신을 향해 열려있어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면 손을 내밀어보세요.'
이런 공익캠페인의 문구나, 상담센터의 홍보는 무기력증에 걸린 사람에게 큰 효과가 없을 것이다.
무기력증에 걸리면 글을 읽고 생각하고 행동에 이르는 과정에 이르지 못한다.
나는 심리학자도 아니고, 무기력증을 해소하기 위한 답을 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아주 작은 성취, 내가 사는 곳을 정리한다거나 내가 자주 다니는 길을 청소한다거나 하는 작은 성취부터 해내야 한다.
커다란 목표를 설정하기보다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작은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작은 계획을 하나씩 밟아나가다 보면 어느새 목표의 언저리에 닿아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인간은 대단한 존재이다. 스스로의 자아와 존재를 인식하고 사색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다르다.
우리는 누구나 대단한 존재임을 인지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는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결국 '나'이다.
타인의 평가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서, 나의 의미와 성취를 찾아내야만 한다.
나의 자아를 찾아가는 삶은 타인의 평가가 어떻든,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하찮지 않다.
스스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살아가는 에우다이모니아를 달성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