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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가시니 Jan 30. 2024

행복한 P가 된 파워 J

|호주 워킹홀리데이 시리즈 | 완벽주의 탈출기|

   누군가는 방향성만을 가진 채 즉흥적으로 선택하며 매 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것을 즐긴다. 한편 다른 누군가는 세세하게 세운 계획을 하나씩 달성하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이전과 호주 워킹홀리데이 초반의 나는 후자라고 할 수 있었다. 시간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떤 경우는 30분, 10분, 5분 단위의 계획을 세운 적도 있다. 계획을 세우며 이를 달성하는 것을 통해서 하루를 풍성하고 알차게 누리는 것이 행복했다.

  한때는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늘 공유하던 MBTI에 과몰입하던 시기는 나에게서 지나갔다. 그렇지만 MBTI의 이름을 빌려서 말해보자면 P(Perceiving)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생활하는 것을, J(Judging)는 목표를 세우고 계획적이고 철저하게 일을 수행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본캐, 부캐 모두 단연코 J라고 할 수 있었던 나는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준비하면서도 유튜브, 책들을 참고하여 계획을 세웠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몰랐지만, 굵직한 목표들을 세우고,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세세한 월별 계획과 목표를 세웠다. 그중 하나는 일에 대한 계획이었는데, 영어 실력의 상승을 기대하며 식당/카페-옷 가게-호텔 리셉션 순서로 세웠다. 호주에 도착여서도 꾸준히 계획을 세우며 주어진 1년이라는 시간을 알차게 쓰기를 원했다. 동기 및 선후배는 드물게 선택하는 휴학이라는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왔기에 시간의 흐름에 나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계획하에 시간을 통제하려 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한 대로 살며 관성을 깨는 것. 즉 나를 기다리고 있는 깃발들을 하나씩 뽑으며 나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스스로가 성장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먼저, 교통수단의 문제이다. 곧 트램이 도착한다고 전광판에 떴지만 도착 예정이었던 트램 번호가 갑자기 전광판에서 사라지며 도착하지 않거나,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갑자기 알 수 없는 곳에서 모두 내리라고 한다거나, 정류장에 대한 안내방송을 전혀 해주지 않는 버스가 많아서 구글맵을 보고 있어도 내릴 곳을 놓치는 일들이 있었다. 시간적인 계획이 틀어지는 경우로 인해 트램을 타기 전에도 초조함이 앞설 때가 있었다.

  다음으로 홈메이트의 문제이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여러 가지 불편은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각오했다. 하지만 외국인과 함께 사는 것은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경험의 연속이었다. 매서운 추위에 익숙한 몽골 가족과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겨울에 한집에서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친절한 동남아 출신 홈메이트에게 고마운 점이 많았지만, 후각이 예민한 나였기에 주방을 사용할 때 그녀의 독특한 향신료 냄새로 인한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이외에도 외국인들의 각종 생활 습관, 문화 차이 등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들었다. 홈메이트와 함께 살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바늘구멍만 한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직장 문제이다. 트램의 노선 변경으로 인해 출퇴근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게 되었던 경우, 보다 일찍 연락해 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출근 30분 전에 종종 근무 시간 변경을 통보하는 슈퍼바이저, 코로나로 락다운이 시행되며 매니저 외에는 모두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트램에 문제가 생기면 트레인, 택시 등 다른 교통수단을 탈 수 있었고, 홈메이트가 불편하면 내가 이사 가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 같은 경우는 그만둔다고 해도, 새로운 일자리를 바로 구하기 쉽지 않아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일에 대한 예측 불가능함과 불확실함은 나에게 불안감, 기대감을 모두 느끼게 했는데 초반에는 불안감이 더 컸다. 구직하게 되면 초조함이 가라앉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미래를 더욱 예측 가능하고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 구인 구직 사이트를 보았다. 또한 불안이라는 감정에서 단순히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이런 노력은 효과가 있었을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통제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결국 나를 더 작은 새장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조건이 만든 불안하고 답답한, 내가 처음 마주하는 감정들을 글로 정리해 보았다. 그 과정에서 “나의 계획대로 하루를 보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명명된 실체 없는 당위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허물을 뒤집어쓰고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발견한 문장 하나가 나의 시각을 바꾸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것이니깐.



시간과 상황을 통제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를 맡겨보았다.

  즉 ‘기다림 연습’과 ‘불확실성 앞에서 패배하지 않는 연습’을 하며, 나는 미래지향적으로 꼼꼼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잠시 놓아두었다. 보이지 않는 미래, 상황이 변하며 잃어버리게 된 목표는 현재를 바라보게 하는 원동력이 되게 해 주었다. 꼭 세워야 하는 계획만 세우고 나머지는 나의 즉흥적인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하였다. 무작정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길을 따라서 계속 걷다가 새로운 길을 발견하기도 하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공원에서 멍 때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영어 공부도 하고, 홈메이트가 파스타 요리하는 것을 잘 봐두었다가 나도 비슷하게 해 먹으며 소소한 일상을 즐겼다.


  물론 이전에도 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나를 통제 밖에 놓아두며 매 순간 나의 마음을 따라서 행동하니 예측 불가능한 내일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기대감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물론 구직도 놓지 않았기에 연락이 오는 곳에 가서 트라이얼을 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인생은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순간을 즐기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호주 워홀의 큰 교훈이었다.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도 나의 통제 밖의 상황, 감정, 일 등을 잘 받아들이며 다루는 것이 삶을 더욱 풍성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지금의 나는 계획은 여전히 세운다. 하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이라는 마음을 먹고 열린 마음으로 상황에 따라 유연하고 유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쉬운 이해를 위해 MBTI를 빌려왔지만 J, P에는 정답이 없다. 현실적으로 소위 성공한다고 불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J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계획을 성취하는 것보다 과정을 즐기는 삶에 더 큰 비중을 두기에 P의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싶다.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내일들이 모여서 행복한 나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너 P야? 응! 해피!


-김미묘 인스타툰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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