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제7회 경상북도 이야기보따리 입선작
대평리 석조여래입상
한 알의 밀알, 그 삶이 흙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문중 산 작은 대리석 표지판 안에서 엄마는 자손들의 뿌리가 되었다. 걸음 할 수 있는 곳이 봉분도 없는 산소뿐이라 안타까워하면서도 고작 명절에만 삐죽 상판을 내미니 이건 또 어떤 변명을 붙일까.
추석이다. 엄마를 보러 간다. 가는 길이 험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면 생색이라도 내겠건만 4, 50분이면 요양시설에 도착한다. 달려가서 십 분 남짓 ‘코로나 식’ 효도를 한다. 돌아오는 길, 미끈한 아스팔트 길을 제쳐두고 엄마와 외갓집 다니던 고불고불한 산길로 든다. 헛헛한 마음을 옛 기억으로 희석하고 싶었는지, 우리끼리 명절을 맞는 게 죄송해서인지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다. 저수지를 지나고 외길을 지나 윗동네인 망간점 쯤에 다다랐다. 친정 동네 초입에 서서 인근 문화재를 알려주던 안내 표지판이 여기도 있다. 군郡 소식지 귀퉁이에 실렸던 생경한 문화재 기사가 어슴푸레 생각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야트막한 길을 자동차가 덜컹거리며 오른다. 시선이 닿을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 단단한 몸집의 실루엣이 있다. 대평리석조여래입상이다. 설명판에 새겨진 몇 구절이 해설사를 대신한다. 가을볕에 여물어 가는 벼 이삭이 고개 숙여 공양한다. 사위를 돌아보니 수피가 절반 벗겨진 노거수가 한 그루 있다. 유일한 이웃도 사그라드는 중이다. 비스듬히 서서 힘겹게 전한다. 석불상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막아줄 지붕 하나 없이 혈혈단신 견뎠노라고. 번듯한 명찰名刹이 못 되어 절간은 허물어지고 시주도 못 받았나 보다. 찾아주는 이는 없고, 흘러간 날들만 더께처럼 앉았다.
화강암 불상의 눈은 닳았고, 왼손은 마모되었다. 목이 거의 없어 얼굴은 더 둥글어 보인다. 살며시 다문 입술과 풍만한 두 뺨이 만드는 고졸한 상이 입 무겁고 마음씨 좋은 종부宗婦 같다. 어깨까지 닿은 귀는 어떤 사연도 다 들어줄 만큼 넉넉하다. 타원형의 광배와 부처의 몸이 한 덩어리로 새겨진 채 무심한 광음이 흐른 탓인가. 돌이끼 돋은 얼굴과 어깨는 풍화에 삭고, 태고의 흔적은 흑화로 고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뭉개진 모습을 보니 씁쓸하다. 엄마처럼 건사할 식솔들 때문에 고생한 건 아닐 터, 초년 호강은 쓸데없고 후분後分이 좋아야 한다는 게 비단 사람만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기교는 없지만 예스러움은 소박하게 남아 있다. 석불상의 질박한 모습은 마치 구면인 듯하다.
엄마는 이제 거죽 없는 자연이다. 돌봄센터 안에서도 자식들의 안녕을 기도하느라 마모되고 있던 육신이 떠 오른다. 그 시대의 아낙들은 며느리 적에 그런 고생은 다들 하는 거라 여기며, 손톱이 닳아서 깎을 필요 없는 시집살이를 당연하게 살았다. 육십 년 세월 동안 청상과부 시모를 모셨고, 까탈스럽고 성미 급한 남편을 섬기며, 육 남매까지 키워 앞가림시켰다. 순간순간의 기쁨과 행복한 찰나가 삶을 지속시키도록 도왔겠지만, 팔순의 인생은 고행길이었다. 시어머니, 시누이 그런 단어에 괜스레 중압감을 느끼는 나의 세대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삶이다.
가을걷이가 한창이던 때, 엄마는 오른손 장지 한마디를 탈곡기에 잃어버렸다. 날이 새도록 통증은 수그러들지 않고, 진통제는 뼈마디를 잃은 고통을 재우지 못했다. 잦은 두통이 있었지만, 손봐야 할 농사일이 매번 먼저였다. 따사로운 봄날, 곱은 손으로 볍씨를 담그고 쓰러졌다. 뇌동맥류 수술로 목숨은 건졌지만, 보행은 불편해졌다. 지금처럼 재활치료의 중요성도 비중도 높지 않을 때라 제대로 된 후속 치료는 없었다. 수술 전 준비로 머리카락을 싹 밀었다. 두개골에는 의료용 스테플러가 남긴 봉합된 흔적이 또렷이 새겨졌다. 병원 생활을 답답해하셨지만, 실상은 시골에 혼자 계신 아버지가 걱정되어 조기 퇴원했다. 민둥한 두피에 머리카락이 자라는 동안 예전의 까까머리 남학생 두상으로 지냈다. 외출할 때는 모자를 쓰지만, 흔적은 다 가려지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자라 상처를 덮을 때까지 엄마는 무시로 손을 대며 쓰다듬는다. 고생한 지난 시간의 결과물이 고작 이건가 푸념도 하면서.
삭아 내린 몸뚱이를 절뚝거리는 걸음이 지탱한다. 그럼에도 벼농사에 고추 따고 콩 심고, 마늘 농사를 지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몸의 진액이 다 빠졌다. 척추협착증이 오고 무릎관절은 으스러졌다. 주위 식구들의 먹거리를 챙기느라 이 병病, 저 병은 모두 당신 몫이 되었다. 오밤중에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이 있었지만, 엄마는 곤히 자는 아버지를 깨우지 못해 참았다. 그 바람에 시술은 늦어졌고 또 다른 후유증을 남겼다. 기억력은 무질서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 엉켰다. 엄마의 육신은 삐거덕거리고, 마모되어 망가지고 있었지만, 부동이 될 때까지 움직였다. 쇠락해 가는 노구를 바라보는 자식의 가슴에 멍울진다. 속상한 마음은 간혹 어설픈 짜증으로 불거진다.
코로나 팬데믹이다. 서글픈 면회를 드문드문 간다. 엄마가 코로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낯선 사람들이 챙겨주는 식사는 입맛을 돌게 못하는지, 엄마는 마스크가 헐렁할 만큼 살이 빠졌다. 혼자 외딴곳에 고립된 외로움이 살을 갉아 먹고, 몸피는 더 왜소해졌다. 체력이 떨어진 육신 탓인가. 정신도 제 자리를 못 찾고, 허둥댄다. 유리창이 가로막은 면회에 큰 소리로 안부를 물어보지만, 엄마는 동문서답만 한다. 그런 와중에 간간이 자식들 근황을 묻는다.
“차멀미 나서 멀리는 못 가고 너른 데 가서 둘러앉아 밥이나 같이 묵었으면 좋겠다.”
엄마는 평생 밥 타령이다. 배고픈 시대를 살아온 목구멍의 갈망인지,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은 밥이다. 기억의 혼재 속에서도 밥에 대한 애정은 사그라지지 않나 보다. 엄마는 마지막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전염병의 무시무시한 위력 앞에 가냘프게 말라가던 면역력은 무너졌다. 종합병원으로 옮겨 치료받던 중 천상으로 거처를 옮겼다. 후미진 곳에 외따로 지내던 석불상처럼 엄마의 마지막 길도 혼자였다. 남편과 여섯이나 되는 자식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배웅을 받지 못했다. 또렷한 정신이 남아 있을 때 좋은 기억으로 이생의 장을 닫았으면 좋았으련만. 애달픈 여식은 시대를, 전염병을 탓하며 상흔을 조금씩 지운다.
너무 서둘러 떠나면 남은 자들의 슬픔이 혹시나 고약한 아픔이 될까, 너무 오래 지체하면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자식들 주머니가 텅 비어 버릴까 봐 고심했나 보다. 엄마는 의식을 닫은 채 3주간을 힘겹게 버티며 식구들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한 상에 둘러앉아 같이 먹자던 그 밥은 결국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더 고생 안 하고, 좋은 데 가셨을 테니 괜찮다.”라는 자기 위로를 숟가락에 얹으며, 우리는 끼니마다 꾸역꾸역 챙겨 먹었다. 당신의 마지막 식사는 오래전에 홀로 한 술 떠시고 곡기를 끊었지만, 육 남매에게는 두리반 하게 했다. 산골 소녀의 꽃 같던 시절과 설렘 안고 시작한 새댁의 발그레한 신혼은 엄마에서 할머니로 갈무리되고, 자연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또다시 추석이다. 윗동네에 있는 선산에 오른다. 끝 간데없는 그리움의 시간만 맴돈다. 기껏 일 년에 서너 번 뵈러 오는 자식들의 버둥대는 삶을 이해하시려나. 엄마를 만나고 내려오는 길에 망간점에 다시 들렀다. 교교皎皎한 곳에서 결 고운 가을볕을 시주받는 석불상의 살갗이 따사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