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과 여전히 붙드는 마음 사이에서
구름 뒤에 숨은 달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빛이 있다.
비 내리는 추석의 밤. 창밖의 어둠은 익숙하고, 그 속에 달이 떠 있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가려도 달은 그 자리에 있다. 빛이 가려진 밤이 오히려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아야 비로소 더 잘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가족, 기억, 그리고 나 자신이 그렇다.
한낮의 명절은 늘 소란스럽다. 부엌의 온도는 높고, 말은 넘친다. 그러나 밤이 찾아오면 그 열기가 조금씩 식는다. 하루 종일 모여 있던 사람들의 발소리가 잦아들고, 집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낮의 소란을 조금씩 씻어낸다. 웃음과 잔소리, 끓는 국물의 냄새,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천천히 사라 지고, 남은 건 젖은 공기와 느릿한 시간뿐이다.
달이 보이지 않는 명절이라니 어릴 적엔 이런 날이 괜히 서운했는데 지금은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꼭 차고 둥근 달을 봐야지만 명절의 의미가 중요한 기념일 처럼 다가오는 건 아니니까. 덜 차 있는 달에도, 흐린 하늘에도 마음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세월은 그렇게 완전함의 기준을 조금씩 바꿔 놓는다.
예전엔 명절이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나 없이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들, 그 안에서 나는 늘 해내야만 하는 사람으로 서 있었다. 그때의 나는 분주한 무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조명은 뜨겁고, 존재감은 분명했다.
이제는 조금 다르다. 완전히 무대를 내려온 것도, 객석으로 물러난 것도 아니다. 그저 무대의 끝자락, 빛이 스치는 경계에 서 있다. 여전히 불빛의 온기를 느끼지만, 그 불빛이 나를 향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지켜보던 장면 속에서 다른 세대가 움직이고, 나는 그 리듬에 맞춰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 나이듦은 어쩌면 ‘머묾의 기술’을 배우는 일이다. 서두르지 않고, 멈추지도 않은 채, 잠시 고요히 그 자리를 지키는 일.
창문에 맺힌 빗방울을 따라가다 보면, 그 속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불빛이 보인다. 삶도 그렇다. 빛이 잠시 가려질 뿐, 완전히 꺼지진 않는다. 오늘의 달처럼, 구름 뒤에서도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 젊은 날의 나에게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 시절의 열심이 지금의 평온을 만들었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를 안아본다.
50이라는 나이는 중간의 시간이다. 끝도 시작도 아닌 그 사이에서 여전히 배우고 놓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앞세대의 그림자와 아이들의 뒷모습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나의 리듬을 다시 배운다. 완전한 평온보다는 불완전한 균형으로, 내려놓음과 머묾 사이에서 살아간다. 달이 떠 있는 줄 알면서도, 그 빛을 직접 보지 못하는 이 밤처럼.
비의 리듬은 어느새 일정해지고, 그 소리에 마음이 맞춰진다. 낮의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 고요가 자리 한다. 명절의 밤은 늘 이렇게 끝난다. 사람들은 흩어지고, 집은 다시 일상의 모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비가 남긴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물길처럼, 마음에도 길이 생긴다. 그 길을 따라 오래된 얼굴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부모님의 젊은 시절, 아이들의 어릴 적 모습,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서 있던 내 모습까지.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한 화면에 겹쳐진다. 그 장면 속에서 문득 생각한다. 나이듦은 사라짐이 아니라, 기억이 조금씩 모양을 바꾸는 과정이라는 걸.
비가 그치길 기다려본다. 달은 여전히 구름 뒤에 숨어 있지만, 그 빛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멀리서도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언젠가 완전히 무대를 내려올 날이 오겠지.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전히 남은 장면이 있고 내 손으로 마무리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 모든 일들이 끝나면 오늘 밤의 빗소리처럼 조용히 앉아 내 마음의 풍경을 바라볼 것이다.
비 오는 명절의 밤에 잠시 멈추어 떠올려본다. 젊은 날엔 그 멈춤이 어색했지만, 지금은 고요 속에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음을 알고 있다. 무대를 내려 오는 건 끝이 아니라 다른 장면 으로 옮겨 가는 일이다. 아직도 마음 한켠은 무대 위에 남아 있지만 이제는 그 불빛을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머묾의 시간 속에서도, 마음은 조용히 자라난다.
by 숨결로 쓰는 biroso나.
<작가노트>
비 내리는 추석의 밤, 구름 뒤에 가려진 달을 바라보며 쓴 글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 그 조용한 빛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구름 뒤의 달처럼, 우리 마음에도 쉽게 드러나지 않는 빛이 있습니다. 젊은 날의 분주함이 삶을 움직였다면, 지금은 머묾이 저를 이끕니다.
비 내린 밤, 그 머묾의 시간 속에서 여전히 제 마음이 무대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고요한 밤의 풍경을,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하루를 견디는 분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독자님께서도 잠시 멈춰, 마음속에 남아 있는 빛 하나를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흐릿해 보여도 그 빛은 사라진 것이 아닐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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