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나의 '우아함'을 갱신했다.
나는 오늘 나의 '우아함'을 갱신했다.
벽면 가득 투명한 병들이 걸려 있었다.
어떤 것은 새벽 안개 같은 보라색이었고, 어떤 것은 잘 익은 복숭아 같은 분홍색이었다.
그것은 이 도시 사람들이 매달 결제하는
'취향의 응축액'
"이번 달도 당신의 취향을 연장하시겠습니까?"
상담원이 기계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모니터에는 지난달 구매 이력이 떠올랐다.
마치 어제 쇼핑한 영수증처럼
[인디 밴드의 고독 패키지]
[북유럽풍 미니멀리즘 사유]
[비 오는 날의 재즈 향수]
그것들은 내 영혼의 일부라고 믿었던 조각들이었지만, 화면 속에서는 그저 바코드 숫자로 치환된 상품일 뿐이었다.
"저... 결제를 좀 쉬고 싶은데요."
나의 말에 상담원의 미소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고객님, 취향 구독을 해지하시면 발생할 부작용에 대해 고지받으셨나요?
해지 즉시 당신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즉시 생기를 잃은 회색으로 보일 것이며, 퇴근길 플레이리스트는 소음으로 바뀝니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나눌 '말씨'가 사라지게 되죠. 당신이라는 문장의 형용사들이 전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난달, 결제를 하루 늦췄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퇴근길 마주한 노을이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던 그 끔찍한 무채색의 공포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머릿속엔 '권장 취향'이라는 글자만 깜빡였다
그냥... 제 취향을 직접 찾아보면 안 될까요?
예전처럼 헌책방을 뒤지거나 길을 잃어보기도 하면서요.
상담원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잘 설계된 기계음이 잘못 송출된 듯한 소리 같았다.
"고객님, '우연'은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싼 사치입니다. 길을 잃는 데 드는 시간, 잘못된 책을 읽었을 때의 불쾌감, 취향을 고르는 고통...
그 모든 리스크를 감당하시겠다고요?
성공적인 취향이란 결제된 알고리즘 안에서만 안전하게 배양되는 법이죠."
그녀의 손가락이 '연장' 버튼 위에 머물렀다.
만료 7분 전.
내 손목의 가느다란 바코드가 자줏빛 경고등을 내뿜으며 굶주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연장... 해야죠. 해야지요."
내 대답과 동시에 계좌에서 숫자가 빠져나갔고, 거치대에 걸린 링거 병의 밸브가 열리자 보랏빛 수액이 차가운 뱀처럼 내 혈관을 파고들었다.
바코드는 비로소 안도한 듯 선명한 푸른 빛을 내뿜으며 내가 여전히 ‘세련된 현대인’임을 증명해 보였다.
문 밖을 나서자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결제 완료 : 당신의 우아함이 연장되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특별한 존재입니다.
나는 안도하며 익숙한 재즈 음악을 이어폰으로 흘려 넣었다. 알고리즘이 골라준 선율이 갓 구운 빵처럼 폭신하게 귓가를 감쌌다.
내 발걸음이 내가 고른 리듬인지, 아니면 결제된 박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우리는 매달 돈을 내고 '나'라는 인형의 태엽을 감고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선호가 정말 나의 것인지 문득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정제된 알고리즘의 안락함에 길들여져 스스로 길을 잃을 권리마저 반납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다 이 글을 썼습니다. 차가운 수액으로 연장되는 우아함보다, 비록 투박하더라도 직접 찾아낸 무언가가 우리의 영혼을 진정으로 숨 쉬게 하기를요.
오늘 느낀 햇살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요?
Ep 01. 취향의 연장
by《취향의 유효기간》ⓒbiroso나.
안녕하세요.
소중한 브런치 글벗님들께 인사드립니다.^^
브런치에 글을 놓아둔 지 어느덧 열 달,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익숙한 감정을 벗어나, 우리가 믿고 있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도입니다.
그동안 제 글방을 찾아주신 글벗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이제 막 시작하는 새로운 이야기의 길도 함께 걸어주실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글벗님들 방에서도 곧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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