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비용

기억의 분리수거, 망각에도 비용이 발생하는 도시

by 숨결biroso나


기억의 분리수거,
망각에도 비용이 발생하는 도시



도시의 공기는 늘 매캐했다.

그것은 자동차의 매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미처 버리지 못한 눅눅한 기억들이 썩어가는 냄새였다.


이곳에서 망각은 신이 주신 공짜 선물이 아니라,

구청에서 발행하는 전용 봉투를 사야만 허락되는 유료 서비스였다.


“손님, 이 기억은 규격 외 폐기물입니다. 일반 망각 봉투에는 담을 수 없어요.”

수거 요원이 코를 찌르는 악취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자취방 현관문 앞에는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는 커다란 보따리 하나가 놓여 있다.


3년 전, 가장 비겁한 방식으로 끝냈던 연애의 잔해들. 미안함과 수치심,

그리고 그 위에 달라붙은 구질구질한 미련들이 여름날의 음식물 쓰레기처럼 부풀어 오른 채


어떻게 안 될까요?
이 기억 때문에 새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서요.

방 안까지 냄새가 진동해요.


나의 간절한 호소에도 요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단말기를 두드려 견적을 뽑았다.

화면에 뜬 숫자는 이번 달 내 월급의 절반에 육박했다.


“이건 ‘특수 세척’이 필요한 중증 죄책감입니다.
그냥 버리면 도시 전체의 무의식이 오염돼요.
망각은 신의 축복이 아니라, 지불 능력이 있는 자들의 특권입니다.
돈이 없으면 그냥 안고 사셔야죠.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요원이 떠난 복도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아 검은 보따리를 응시했다.


부유한 자들의 동네는 늘 상쾌한 향기가 났다.

그들은 매일 아침 어제의 실수와 부끄러움을 고가의 망각 서비스에 실어 보낸다.

그들의 영혼은 늘 방금 세탁한 셔츠처럼 빳빳하고 깨끗했다.


반면, 이 낡은 빌라촌의 사람들은 모두 어깨가 굽어 있었다.

버리지 못한 슬픔과 해묵은 원망들을 방 안에 켜켜이 쌓아두느라 숨 쉴 공간조차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자의 방이 좁은 것은 짐이 많아서가 아니라,
버리지 못한 기억들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서겠지


방으로 들어와 창문을 열었지만, 환기되지 않는 기억의 악취는 침대 밑까지 파고들었다.


문득 벽 너머 옆집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 여자도 아마 지난밤들의 실수를 버릴 봉투값이 없어 밤새 그것을 껴안고 앓고 있을 것이었다.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 말하지만, 이 도시에서 시간은 이자를 받아내는 사채업자에 가까웠다.


버리지 못한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무거워지고, 더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영혼을 잠식했으니까.


결국 돈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방을 기억의 쓰레기 매립지로 내어준 채,

서서히 그 악취에 중독되어 스스로가 누구였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나는 결국 서랍 깊숙이 넣어둔 비상금 봉투를 꺼냈다.

다음 달 식비를 포기하고서라도 이 지긋지긋한 '그'를 내 인생에서 도려내야 했다.


사랑의 대가는 이별이 아니라, 이별 후에도 남겨진 것들을 치우는 비용인 것인가?


결제 버튼을 누르자 수거함의 뚜껑이 열렸다.


보따리를 밀어 넣는 순간, 기묘한 상실감이 명치를 때렸다.

악취가 사라진 방은 깨끗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텅 비어 있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조차 사라지고 나니,

내가 보낸 3년이라는 시간 자체가 통째로 압류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깨끗해진 방 한가운데 앉아, 다시 무언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나는 또 다른 기억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고, 다시 그 기억을 버리기 위해 노동을 반복할 것이다.


이것은 연재되는 생(生)의 굴레다.


우리는 살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해 채우고 있었다.




망각조차 자본의 논리에 따라 배급되는 도시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돈이 없어 이별의 잔해를 방치해야 하는 이들의 슬픔은 어떤 냄새가 날까요? 모든 것이 매끈하고 깨끗하게 관리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영혼의 그늘'들을 직시하고 싶었습니다.

비워진 방의 정적은 깨끗함보다 차가움에 가까웠습니다. 기억을 지불한 대가는 비단 돈뿐만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내일 다시 채워질 기억들은 어떤 향기를 담게 될까요? 사라진 악취 대신 방 안을 채운 것은 낯선 나 자신이었습니다.




당신이 가장 먼저 버리고 싶은 기억은 무엇인가요? 혹은, 끝내 버리지 못할 기억이 있나요?

Ep 02. <기억의 분리수거>
by 《취향의 유효기간》 ©biroso나.


안녕하세요.
소중한 브런치 글벗님들께 인사드립니다.^^
브런치에 글을 놓아둔 지 어느덧 열 달,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익숙한 감정을 벗어나, 우리가 믿고 있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도입니다.
그동안 제 글방을 찾아주신 글벗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이제 막 시작하는 새로운 이야기의 길도 함께 걸어주실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글벗님들 방에서도 곧 뵙겠습니다.^^




#기억 #취향의유효기간 #망각의비용 #풍자 #사유하는글쓰기#비워내기 #자본주의 #계급사회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