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낙원을 구독하는 밤
가짜 낙원을 구독하는 밤
어둠이 내리면 도시는 거대한 수면 캡슐로 변한다.
불이 꺼진 방마다 누군가의 꿈이 켜지고, 사람들은 각자의 밤을 결제한 만큼만 살아낸다.
이 도시에서 '무료로' 꿈을 꾸는 사람은 없었다.
침대 머리맡의 단말기가 낮게 울렸다.
잔액 부족
나는 눈을 감은 채 손목을 들어 올렸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메뉴판이 명멸했다.
그것은 오늘 밤 내가 머물 수 있는 '꿈의 평수'와 '낙원의 등급'을 결정하는 결제 창
- Standard: 광고 포함, 4시간
- Premium: 지중해의 파도 소리, 첫사랑의 기억 (6시간)
- Royal VIP: 신이 된 듯한 전능감 (무제한)
지난달 ‘취향 연장’과 ‘기억 분리수거’에 쏟아부은 비용 탓에 통장 잔고는 처참했다. 나는 결국 가장 비루한 ‘Standard’ 버튼을 눌렀다.
'저화질, 무작위.'
그게 지금 내가 살 수 있는 생의 전부였다.
눈을 감자마자 공기가 바뀌었다.
나는 텅 빈 광장에 서 있었다. 하늘은 색을 잃은 채 눌려 있었고, 광장 한복판에는 거대한 전광판이 서 있었다.
화면 속 남자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삼키며 기괴하게 웃었다.
[지금 당신의 휴식은 '노아 제약'의 후원으로 제공됩니다]
문장이 지나갈 때마다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광장을 벗어나려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경계.
내가 결제한 금액만큼만 허용된 좁은 세계. 그 선 바깥은 형체 없는 어둠뿐이었다.
“이봐, 자네 꿈은 어때?”
언제부터 있었는지 옆집 남자가 곁에 서 있었다. 현실에선 썩은 우유 냄새가 진동하는 방에 살면서 밤마다 최고급 패키지를 구독한다던 자였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난 어제 신(神)이었어. 바다를 다 마셨지.”
그는 잠시 멈췄다가 비릿하게 웃었다.
“근데 눈을 뜨니까…… 입안에 먼지만 남더라고. 그래서 오늘 또 결제했어. 그 파란 물결이 아니면 내 방의 곰팡이를 견딜 수가 없거든.”
그의 몸이 가짜 데이터처럼 깨지듯 흔들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장면이 툭, 끊기며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냉장고 안에는 음료 대신 색색의 약병들이 줄지어 있었다.
[재벌 2세의 파티], [첫사랑과의 재회],
나는 맨 아래에 놓인 [평범하고 따뜻한 집밥]을 집어 들었다.
“손님, 이건 화질이 떨어져서 기억도 금방 휘발될 텐데요.”
아르바이트생의 시큰둥한 말투에 나는 지갑 속 마지막 동전을 털어 넣었다.
괜찮아요. 잠시만 쉬고 싶어서요.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느 낯선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창가에 걸려 있었고 부엌에서는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고생했어, 얼른 먹어.”
그 말이 너무 늦게 와서, 너무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말이라 숟가락을 든 손이 떨렸다.
그때 발등이 간지러워졌다. 시간이 끝나간다는 신호였다. 우리는 꿈속에서도 시계를 본다.
행복은 결제한 만큼만 허락되니까.
따르릉—
[대여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현실로 복귀합니다.]
눈을 뜨자 곰팡이 핀 천장이 보였다. 어젯밤의 온기는 한 조각도 붙잡히지 않았다. 거리로 나오자 전광판이 비웃듯 켜졌다.
[당신만 빼고 모두가 특별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연장하세요]
주머니 속 동전을 만졌다. 차갑고 가벼웠다.
현실의 비루함을 잊게 해 줄 가짜 행복. 그 달콤한 마약 같은 임대료를 위해 나는 다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문밖을 나선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잠드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견디기 위한 가짜 기억을 충전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있었다.
가짜 기억의 할부를 멈추고
비로소 당신의 방에서 평온하기를.
오늘 밤도 우리는 각자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어딘가로 접속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화면 속 화려한 타인의 삶을 구독하며 나의 초라한 방을 잊으려 애쓰는 우리의 모습이 저화질의 집밥 꿈을 꾸는 모습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정한 휴식은 결제창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곁의 온기를 오롯이 마주할 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비록 지금 우리 손에 든 동전이 차갑고 가벼울지라도 가짜 기억에 기대지 않고도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p 03. <꿈의 임대료>
by 《취향의 유효기간》 ©biroso나.
안녕하세요.
소중한 글벗님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브런치에 글을 놓아둔 지 어느덧 열 달,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익숙한 감정을 벗어나, 우리가 믿고 있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도입니다.
그동안 제 글방을 찾아주신 글벗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이제 막 시작하는 새로운 이야기의 길도 함께 걸어주실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곧 글벗님들 방에서도 곧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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