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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Jan 20. 2023

낙방(落榜) 소회

겨우 잠이 들었는데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이 떠진 것은 절대로 집으로 오는 길에 확인한 낙방 소식 때문이 아니다. 저녁 모임 끝 다 늦게 마신 별다방의 진한 아메리카노 커피 때문이지 절대 그까짓 낙방 소식 때문이 아니다.  


뒤척이면 뒤척일수록 잠은 멀어지고 눈동자와 의식은 또렷해지는 것이 다시 잠이 들기는 글렀다. 가만히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재차 확인해 봐도 ○○재단의 OO채용사업 심사결과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 불합격, 낙방이 분명한 것이다.     


떨어진 이유야 어떻든 낙방을 확인한 순간부터 ‘상처받지 말고, 낙심도 하지 말자’고 누누이 다잡았지만, 마음이나 몸이나 잠 못 들고 뒤척이는 걸 보면 적잖이 실망하고 속이 상한 것이 분명하다.     

     

지난 11월, 제 일처럼 발 벗고 나서준 후배 덕분에 그 후배가 교수로 있는 지방소재 某 대학의 추천을 받아 OO채용사업에 응모할 수 있었다. 1월 초로 예정된 심사결과 발표일이 무한정 지나가면서 적잖이 조바심이 생겼다. 심지어 돌아가신 할머니의 꿈을 꾸고는 혹시 결과를 미리 알려주시려는 현몽은 아닐까 싶어 꿈 풀이까지 해봤을 정도였으니, 그 간절함과 기대란 내 의식과 무의식의 총합이었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이때까지 어려웠던 순간들이 적지 않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패하거나 상처받은 경험은 별반 없었던 것 같다. 대학 입학도 입사도, 승진을 포함한 회사생활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하는 인생이라는 길을 용케 큰 실패 없이 꾸역꾸역 잘도 걸어왔다. 유독 내 길이 수월해서 실패하지 않은 게 아니라, 포기하지 않으니 실패할 일이 적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애초 목표 자체가 높거나 크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인생 2막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못 돼 제대로 돌부리에 걸린 것이다.          

 

낙방을 확인한 순간의 느낌은 막막함이었다. 무얼 시작해도 빠르지 않은 나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 막막함이 그 약점을 파고들었다. 적당히 내세울 수 있는 명함과 얼마간의 대가가 보장된 기회가 물거품이 되고 다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막막함, 그것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다시 누워 잠을 청해 보았지만, 선잠이 잠시 왔다 갈 뿐 뇌는 피곤한 몸을 들볶으면서 각성상태를 지속하였다. 차라리 절이라도 하자 싶어 씻고 나왔다. 방석을 펴고 108배 따라 하기 영상을 켜고 기도문에 맞춰 절을 시작하였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모든 것을 반성하고 참회하고, 순간순간 모든 것을 알아차리면서 지금 이 자리에 집중하라는 기도문이 한마디도 와닿지 않았지만, 일 배 일 배 108배를 다 채웠다. 온몸이 뻐근해지고 등줄기가 촉촉해지면서 날뛰던 마음과 몸이 조금이나마 가지런해졌다.      


다행이다. 그 와중에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채웠으니 다행이다. 막막함도 조바심도 웬만큼 눅어졌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잠시 흔들렸던 눈동자도 초점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떡 줄 사람 속도 모른 채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 민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목전에서 문이 닫히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을 떠올려 본다. 주저앉지 않고 걷다 보면 활짝 열린 새로운 문이 나타나겠지.......     


그나저나 이제 동, 서, 남, 북, 어디로 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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