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발 걷기의 꽃, 장거리 산행 -
맨발로 걷는 게 제법 익숙해지면 자신감이 붙으면서 밋밋한 평지나 집 곁 낮은 숲길을 걷는 것이 단조롭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좀 더 멀리, 조금 더 높은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는 어쩌면 끊임없이 삶의 지평을 넓히고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도전해 온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꽃샘추위가 이미 꽃잎을 활짝 열어젖힌 생강나무꽃들을 시샘하던 날, 세 개의 산을 오르내리며 13km를 맨발로 걸었다. 그전까지 걸어본 가장 긴 거리인 7km를 단번에 배 가까이 뛰어넘은 것이다. 두어 차례 7km 정도를 별 어려움 없이 걸었던 경험과 자신감 때문에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처럼 겁 없이, 그리고 별 준비 없이 도전하게 된 것이다.
맨발로 걷는다는 것은 전장에서 갑옷을 벗는 것과 매한가지다. 적의 창칼과 화살로부터 내 몸을 지켜주는 갑옷을 벗는 것이다. 신발을 벗는 순간 발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돌부리에 걸리거나 가시에 찔릴 수도 있고, 미끄러져 넘어질 수도 있다. 더구나 거친 산을 맨발로 오르내린다는 것은 평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이런 위험을 무시하고 준비 없이 무모하게 장거리 맨발 산행에 도전하는 것은 설사 성취의 기쁨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건강에는 도움이 못 된다. 장거리 산행이 맨발 걷기의 꽃이라 해도 ‘심신의 건강회복과 증진’이라는 맨발 걷기의 목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산길 13km를 3시간 40분 만에 무사히 걸은 것은 뿌듯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나 사흘이 지나도 풀어지지 않는 근육통과 무릎의 욱신거림은 그때 그 자신감이 자만심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게 해 준 쓴 약이 되었다. 무모한 도전의 경험자로서 도전을 꿈꾸는 또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장거리 맨발 산행을 하면서 느낀 점들과 주의사항을 정리해 본다.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그리고 절실하게 느낀 점은, 자신을 과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임계점에 도달하면 누구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순간과 대면하게 된다.
그날 나는 석성산을 찍고 선장산을 거쳐 향수산을 돌아 중간으로 내려오는 총 13km의 산길을 걸었다. 8km 거리의 향수산까지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걸었지만, 하산을 시작한 직후부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급속하게 몸이 무거워지고 이곳저곳에서 겪어보지 못한 신호들이 들려왔다. 그것은 비명이었다.
목표지점을 1km쯤 남겨놓고는 숫제 발자국을 뗄 때마다 ‘포기’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나도 내가 이럴 줄은 정말 몰랐다!
신발을 신고 20km를 걸을 수 있다고 해서 맨발로도 그럴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장거리 맨발 산행은 신발을 신고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고, 겸손해지자.
두 번째 느낀 것은, ‘혼자 하지 말 것’이다. 맨발 걷기는 늘 부상의 위험이 뒤따른다. 더구나 부상은 발과 다리에 집중될 수밖에 없어 심하면 거동 자체를 못 하게 될 수도 있다. 혼자 걷다가 인적이 드문 산길에서 다쳤을 때의 그 막막한 상황을 생각해 보라. 좋은 동반자 두세 명과 함께 도전한다면 걱정은 줄고 즐거움은 배가될 것이다.
셋째, 스틱은 장거리 맨발 산행의 필수템임을 기억하자. 신발은 충격을 완화해 주는 에어백이자 속도와 추진력을 높여주는 액셀인 동시에 미끄럼을 방지하는 ABS 브레이크다. 맨발 산행은 자발적으로 이 모든 장치를 버리고 하는 운동이다. 이때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장비가 스틱이다. 스틱은 완충장치이자 액셀이고 브레이크이면서 급격한 출력(체력) 저하를 막아주는 첨가제라는 점을 명심하자.
스틱과 물, 간편식과 여벌 옷 등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날 만일 스틱이 없었다면 중도 포기를 하였거나, 아직도 무릎이며 근육의 통증에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넷째, 힘들면 중단하라. 맨발 걷기는 기록을 재고 순위를 다투는 경주가 아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마지막 승부는 더더욱 아니다. 힘들면 중단하고 후일을 기약하라. 그리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걸어라. 자신의 페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급속도로 피로가 밀려온다.
초보 마라토너들이 중도에 포기하는 가장 큰 원인이 자신의 기록을 일시에 뛰어넘어보려는 욕심이다. 과욕을 부리는 자에게 산은 아름답지도 자비롭지도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산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치명적인 공격을 하기도 한다.
아울러 충분한 휴식 등을 고려해서 여유 있게 시간 계획을 짜자. 시간에 쫓기면 페이스를 잃고 무리를 하기 마련이다. 그날 나는 오후 3시부터 산행을 시작하였다. 해가 길어지긴 했어도 그 정도 거리면 최소 두 시간 전에는 출발했어야 정상이었다. 맨발로 산을 세 개나 오르내리는 것은 자신감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꾸물거리다가 일몰 전에 하산을 못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쉬지도 못하고 무리하게 속도를 내면서 페이스를 잃었고,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다섯째, 지도 앱을 활용하고 표지판을 놓치지 마라. 하산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었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낯선 길이었다. 바로 멈춰 서서 휴대폰을 꺼내 지도 앱으로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산사람들이 즐겨 쓰는 ‘산들샘〔나들이〕’라는 앱으로, 원래 가야 할 길에서 한참을 벗어났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서둘러 걷다 보니 갈림길에서 표지판을 놓친 탓이었다. 지도 앱을 켜놓아서 다행이었지 다 저녁에 하마터면 한참을 헤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산길은 익숙한 길이라도 헤매기는 다반사다. 특히 어스름 무렵에는 그 길이 그 길 같아 보여 더 위험하다. 전문가라 해도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장거리 맨발 산행을 할 계획이거나 평상시 산행을 즐겨한다면 지도 앱 하나쯤 설치해 놓고 사용방법을 익혀놓자. 안전한 산행을 위해 간과해서는 안 될 필수템이다.
끝으로, 즐기면서 걷고, 몸의 말에 귀 기울여라. 맨발 산행에 중요한 것은 속도와 거리가 아니라 즐거움과 행복, 건강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파란 하늘과 햇살을 바라보고, 새들의 지저귐과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어보자. 햇살의 따스함과 볼을 스치는 바람을 느껴보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몸이 내게 하는 말에 귀 기울여보자.
몸은 끊임없이 말을 한다. 기분이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한다. 그 말들에 귀를 기울이자. 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온전히 자신을 알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상태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이 있어야 행복과 가까워질 수 있다.
긴 거리를 맨발로 걷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고행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밋밋한 평지나 집 곁 낮은 숲길을 걷는 것이 단조롭게 느껴질 때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한 멋진 도전이기도 하다. 힘든 만큼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기에 멋진 도전인 동시에 맨발 걷기의 꽃인 것이다. 나는 어느새 향수산 너머 아직 가보지 못한 더 먼 산 어디쯤인가에 피어있을 그 꽃을 향해 걷고 있는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