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세계의 광장 스토리-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파리 외곽 바스티유 감옥이 분노한 시민들의 습격을 받아 함락됐다. 습격을 유발한 건 요새를 개조한 바스티유 감옥의 높은 벽에 설치된 대포였다. 민중의 눈에는 대포를 비롯해 견고한 석조건물과 거대한 성채가 위협과 공포로 비쳤을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은 단순한 감옥이 아니라 민중을 억압하는 프랑스왕정(ancien regime)의 상징이었다. 민중에 의한 바스티유 감옥 함락이 프랑스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도 그 이유였다. 하지만 막상 감옥의 문이 열렸을 때 죄수는 7명뿐이었다. 그것도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 같은 경범죄자들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린 민중의 분출하는 에너지는 멈출 줄 몰랐다. 그들은 루이 15세 광장(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으로 향했다. 결국 루이 15세의 동상과 조각물들은 성난 민중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역사의 현장인 바스티유 감옥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다만 지하철 바스티유역 지하층에 당시 감옥의 초석이 남아 있고 바스티유 광장 주변에 감옥이 있었다는 푯말이 설치돼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바스티유 광장은 규모가 상당히 크고 한가운데에 52m 높이의 ‘7월 혁명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꼭대기에는 뒤몽이 조각한 ‘자유의 수호신’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기념비 원기둥에는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탑 아래에는 두 혁명의 희생자 504명 유골이 안치돼 있다.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된 후 41년 동안 프랑스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계속 혁명을 요구했으며, 혁명은 항상 피를 불렀다. 프랑스대혁명의 진원지답게 지금도 파리에서 일어나는 시위는 주로 바스티유 광장에서 시작해 콩코르드 광장으로 향한다. 바스티유 광장을 둘러싼 원형의 교차로를 건너면 사각형의 중앙 보행공간이 나온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산책하고 쉬어갈 수 있도록 작은 분수와 벤치가 놓여 있다. 가끔 파리지앵들이 이곳에서 조깅하며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스티유 광장 한가운데에 세워진 52m 높이의 '7월 혁명 기념비' 꼭대기에는 '자유의 수호신'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광장 건너편에는 시민들이 산책하고 쉬어갈 수 있는 보행공간이 있다.
파리에서 프랑스대혁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하나 더 있다. 콩코르드 광장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튈르리 정원을 지나면 콩코르드 광장을 만날 수 있다. 콩코르드 광장 중심에는 이집트 룩소르에서 온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프랑스 제국주의가 이집트에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니라 프랑스 학자가 이집트 고문자를 새롭게 해석해 낸 공헌에 대한 보답으로 이집트 정부가 프랑스 루이 필리프 국왕에게 선물한 것이다. 룩소르의 오벨리스크는 구조가 아주 간결하고 그 비례가 적절해, 보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느낌을 준다. 특히 비석면에 음각된 고대 이집트 문자는 신비한 그림과 문양으로 돼 있어 고대 도시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꼭대기에 금으로 장식한 부분이 가장 생기있고 영롱해 보인다.
오벨리스크 옆에는 눈길을 끄는 두 개의 분수가 있다. 정식 명칭은 ‘바다의 분수’와 ‘강의 분수’로, 1840년 5월 설치됐다.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마들렌 성당과 가까운 것이 강의 분수, 반대쪽이 바다의 분수다. 광장 재정비를 맡은 건축가 이토르프가 프랑스 해군을 칭송하기 위해 청동으로 제작했다.
콩코르드 광장은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하기 26년 전인 1763년 처음 완공됐다. 콩코르드 광장이 만들어진 유래는 이렇다. 1748년 루이 15세의 병이 위중해지자 한 예술가가 그를 위한 동상을 만들었다. 병이 완쾌된 루이 15세는 이 동상을 놓을 만한 장소를 찾다가 지금의 콩코르드 광장 자리에 대규모 광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후 설계안을 모집한 결과 파리의 일류 건축가 자크앙주 가브리엘의 작품이 최종 선정돼 루이 15세 광장이 만들어졌다. 루이 15세 광장은 피라미드가 한가운데 위치해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가장 낮은 곳에는 광장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각과 소조가 놓여 있다. 그런데 26년 뒤에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고 결국 루이 15세의 동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파리 카르나발레 역사박물관에는 이 광장에 유일하게 남겨졌던 루이 15세의 청동 팔뚝이 보관돼 있다. 광장에 실물로 존재했던 거대한 피라미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원래 루이 15세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졌고 이때부터 ‘자유 광장’이라고 불리게 된다. 하지만 자유 광장을 지배했던 것은 단두대와 공포 정치였다. 지금도 광장 한편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처형당한 지점을 표시한 동판이 놓여 있다. 공포 정치의 상징인 로베스피에르도 결국 콩코르드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왕정복고를 거쳐 1830년 새로운 혁명이 일어났지만 입헌군주제는 유지됐고, 루이 필리프가 국왕이 됐다. 5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광장은 중심이 되는 주체를 잃고 이름도 모호해졌다. 이때 이집트에서 룩소르의 오벨리스크를 보내왔고 루이 필리프의 결정에 따라 지금의 자리에 오벨리스크가 세워지고 광장이 재건됐다. 파리 시민들은 과거에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에 이제는 모두가 화합하고 평화로울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광장 이름을 ‘콩코르드(화합)’라고 명명했다. 파리 바스티유 광장과 콩코르드 광장은 절대왕정에서 인권을 중시하는 국민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룬 프랑스대혁명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광장은 격동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목격하고, 세월의 흐름 속에 그 흔적을 간직하면서 그 공간을 찾는 이들에게 말없이 역사를 증언한다. 그래서 광장의 역사성은 중요하다. 광화문광장도 일제가 철저히 훼손한 조선의 도읍지 한양의 역사성을 되찾기 위해 의정부 터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광화문 앞 월대도 복원될 예정이다. 아울러 서울시는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사업을 통해 정부서울청사 앞에 역사광장을 만들 계획이다. 광화문광장은 지난 2016년 시민들이 주체가 된 촛불혁명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오는 7월 세종문화회관 앞 도로를 보행공간으로 바꿔 시민광장을 조성할 계획이다. 바야흐로 광화문광장은 역사광장과 시민광장을 아우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광장으로 거듭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