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15
"안녕하세요, ○○○입니다. 항상 주민 여러분 곁에서 함께하겠습니다 "
나는 잠시 폰을 내려다봤다. 곁에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우리 동네 골목 앞 건널목. 차들이 사방에서 엉키는 그 복잡한 교차로에서, 아이 하나가 다쳤다. 뛰어놀던 아이였다. 신호등 하나 없는 그 건널목에서 차를 피하지 못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 그 순간을 목격한 사람들의 가슴은 한동안 내려앉아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 정치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등 하나만 달아달라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골목 앞이라고.
사고가 났다고.
그는 성실하게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
"네, 알아보고 조치하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한 달을 기다렸다.
두 달을 기다렸다.
계절이 바뀌었다.
신호등은 달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그 건널목을 뛰어서 건넜다.
그리고 나는 그 번호로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다.
그때 곁에 있던 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골목을 내다보던 동네 어른들이었다.
K팝이 빌보드를 점령하고, K드라마가 에미상을 받고, K방산이 유럽 시장을 뚫는다.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는 시대다. 공항에서 외국인이 한국말로 말을 걸어오는 시대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잘난 나라의 정치는 왜 이 모양일까.
K컬처는 세계 1류인데, K정치는 어째서 스스로도 민망할 만큼 3류인 걸까.
나는 그 이유를 꽤 오래 생각해 봤다.
그리고 최근에야 조금 알 것 같아졌다.
하나는 위를 향한 얼굴. 하나는 아래를 향한 얼굴.
위를 향한 얼굴은 놀랍도록 부드럽다. 유연하고, 다정하고, 어떤 눈치도 놓치지 않는다. 당 대표의 말 한마디에 표정이 바뀌고, 실세의 동선을 따라 몸이 움직인다. 줄을 서는 속도가 남다르고, 아첨의 문법이 정교하다. 저 사람은 저걸 언제 연습했을까 싶을 만큼.
아래를 향한 얼굴은 선거철에만 나온다.
"철새 정치"라고 부르기엔 철새가 억울하다. 철새는 그래도 계절마다 온다. 정치인들은 4년에 한 번, 혹은 필요할 때만 온다.
"유령 대의원"이라고 할까. 평소엔 존재하지 않다가, 표가 필요한 순간에만 소환된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은 따로 있다.
"ATM 민주주의". 주민은 현금을 넣는 기계고, 정치인은 그 돈을 꺼내 쓰는 사람이다. 4년마다 한 번씩 와서 버튼을 누르고, 돈이 나오면 유유히 사라진다. 신호등 하나 달아달라는 전화엔 묵묵부답이어도, 그건 자기 일이 아니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는 것.
개인으로 만나면 괜찮은 사람들이 많다. 진심으로 지역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엔 뭔가 바꾸겠다는 마음으로 출마한 사람도 분명 있다.
그런데 그 시스템 안에 들어가면 변한다.
위에 잘 보여야 공천을 받고, 공천을 받아야 당선이 되고, 당선이 되어야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논리. 그 구조 안에서 주민은 언제나 후순위가 된다. 진심은 전략이 되고, 정책은 구호가 되고, 사람은 표가 된다.
"알아보고 조치하겠습니다"는 말이 그 구조 안에선 그냥 통화 종료 버튼이다.
나쁜 사람이 만든 나쁜 정치가 아니라 나쁜 구조가 좋은 사람을 조금씩 나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더 무섭다.
이번엔 사진도 첨부되어 있다. 동네 어르신과 손을 잡고 환하게 웃는 사진. 전통시장에서 순대를 드시는 사진.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나는 그 사진들을 오래 들여다봤다.
저 아이들이 뛰어노는 골목 앞 건널목에 신호등이 생겼을까.
저 웃음이 6월 4일 이후에도 이어질까.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저 사진들은 투표일 이후로는 다시 찍히지 않을 것이다.
진심이 있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이 10년을 버틴 건 팬들이 그들의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고, 봉준호의 영화가 세계를 울린 건 이 사회의 진짜 얼굴을 담았기 때문이다.
정치도 그렇다. 진심이 없으면 결국 들킨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다.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그 문자가 얼마나 무게 없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 "알아보고 조치하겠습니다"가 얼마나 공허한 말인지도. 그러면서도 또 찍어준다. 딱히 대안이 없어서. 그래도 나아지길 바라서. 혹은 그냥 지쳐서.
그 지침 위에서 정치는 계속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건널목 앞에, 언젠가는 신호등이 생겼으면 한다고.
선거철이 아닐 때 먼저 전화해 오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고.
아이들이 안심하고 건널 수 있는 동네를 만들어줄 사람을 뽑고 싶다고.
문자 한 통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