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 머무는 자리, 마음의 쉼표

by 박정민

삶과 사랑, 기억과 시간 위에 스미는 ‘여’의 깊은 울림


‘여’라는 글자 하나에는 우리의 평범한 하루와 크고 작은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칠 법도 한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유’, ‘여백’, ‘여생’, ‘여행’, ‘여가’, ‘여럿’, ‘여심’, ‘여명’, ‘여정’, ‘여인’, ‘여보’처럼


‘여’로 시작되는 단어마다 각기 다른 빛깔을 내며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곤 하지요.


먼저 ‘여유’라는 단어를 떠올려 볼까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허락할 때, 마치 다정한 손길이 지친 어깨를 가만히 다독이는 듯한 평온이 찾아옵니다. 분주한 발걸음 속에서도 잠시 멈추어 하늘을 바라볼 틈, 바로 그 여유야말로 스스로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일지 모릅니다.


마음 한편이 꽉 들어찬 날이면, 그 비워둔 빈자리가 어느샌가 ‘여백’이 되어줍니다. 한국 수묵화의 여백처럼, 그저 텅 빈 허공이 아니라 그림 전체를 이끌고 여운을 남기는 공간, 비워야만 비로소 보이는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그런 자리 말이지요.


일상에서도 여백은 우리 내면의 고요를 지키는 숨구멍이 되어, 더 나은 내가 되고자 비우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여생’이라는 단어 앞에 서면, 나머지 삶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게 됩니다. 흔치 않은 작별의 순간에도, 그 끝자락에 은은하게 비춰오는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되지요.


‘여진’처럼 아직 흔적이 남아 있는 순간들이 남은 시간의 행로 어디에라도 조용히 깃들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여생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내 손에 쥐어진 선택의 힘이야말로 살아 있는 증거, 경이로움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여행’은 떠남을 넘어 언제나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낯선 풍경과의 마주침, 바람결에 실린 이름 모를 자유, 그 속에서 문득 내 마음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조용히 묻고 답하게 되지요. ‘여행’이라는 단어가 건네는 속삭임, 어쩌면 걷는 내내 마음에 여유와 설렘을 담아 너그럽게 나 자신을 마주해 따뜻한 권유일지도요.


하루의 틈마다 찾아오는 ‘여가’는 나를 위한 작은 쉼표입니다. 해야 할 일에만 매달리던 걸음에서 살며시 벗어나 조금쯤 더 너그러워지는 순간, 그 여가 속에서 묻혀 있던 내 감성. ‘여심’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게 됩니다.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소망들이 고개를 내밀고, 무심코 지나쳤던 나 자신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시간이 되지요.


혼자가 아닌 ‘여럿’이 어울려 보내는 날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품는 과정을 통해 우리라는 존재의 풍성함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 조용하지만 언제나 곁에 있는 ‘여인’의 섬세한 손길과 따스한 눈빛이 이 순간들을 더욱 빛나게 하지요.


사랑하는 이를 부를 때 입에 담는 ‘여보’라는 한 마디. 그 단어에는 세상 모든 ‘여’가 조용히 깃들어 있습니다. ‘여보’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인생을 함께 건너는 동반자를 향한 다정한 부름이자, 일상을 감싸주는 포근한 울타리입니다.


마음의 ‘여백’을 존중하고 서로의 ‘여유’를 소중히 여기며, 때로는 조심스레 ‘여심’을 헤아리는 부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그렇게 ‘여보’는 두 사람이 걸어가는 긴 ‘여정’의 다른 이름인지도요. 끝없는 길 위에서 서로의 손을 꼭 맞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 시간이야말로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아닐까요.


이렇듯 ‘여’라는 글자는 그저 기호 한 자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감싸는 언어이자, 가만히 마음을 어루만지는 바람입니다. ‘여광’처럼 한순간 번지는 환한 빛나임, ‘여운’처럼 오래도록 남아 속삭이는 기억, ‘여울’처럼 조용히 흔들리는 감정의 물살. 이 모두가 ‘여’라는 이름 아래 흘러가고 있습니다.


내 안 깊숙이 남아 있는 작은 ‘여음’을 들어보면, 그 틈새에서 내가 나에게 건네는 소중한 속삭임이 들려오기도 하지요. 아무리 바쁜 하루라 해도 문득 고개 들어 반짝이는 ‘여’를 찾아보는 일, 그것만으로도 한층 더 깊고 고요하게 숨 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여’가 전하는 삶의 온도를 감싸 안고, 그 안에서 내 몫의 ‘여백’‘여유’를 소중히 지켜가는 것.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빠르게만 달려가기보다 가끔 멈추어 서서 내 마음 깊은 곳의 파동을 귀 기울여 보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소중한 ‘여럿’과 함께 웃고 따뜻한 시간을 나눌 수 있다면, 그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인생은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 한 구석에도 작은 ‘여’ 하나가 남겨지길 바랍니다. 그 ‘여’가 내일의 시간을 품은 은은한 등불이 되어, 끝없는 인생길을 차분하게 밝혀주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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