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 저자 댓글에 대한 반론 & '사주는 없다' 서평 part-2
(사주는 없다 서평 part-1)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은 이미 정해진 '레시피'를 따르려 할 뿐, 그 속의 원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아요. 여러분이 빵 한 덩어리를 만든다고 가정해 보시죠. 밀가루를 담아 물을 넣고 이스트를 넣어 반죽과 섞은 부풀려 접시에 올려 오븐에 구우면 됩니다. 그게 빵 만드는 '레시피'입니다. 하지만 빵 한 덩이를 이해한다는 건 발효의 생물학적 원리, 재료 유통, 물리학, 열역학 등 이 모든 원리를 제대로 파악했다는 의미죠. 사람들은 무언가를 만들고 디자인하려 할 때 단순히 정해진 방식, 즉 레시피를 따르려 합니다. 하지만 레시피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최고의 빵 레시피를 갖고 있어도 절대 오믈렛을 만드는 방법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요리의 본질을 이해했다면, 빵, 오믈렛, 샌드위치 등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분야의 핵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레시피만 고집하다 보면 어느 순간 턱 막힐 때가 올 거예요." - 짐 켈러 (반도체 공학의 전설)
(링크 참조)
처음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본질을 외면한 채 레시피(공식)만을 외우는 실수를 합니다. '일지 용신이면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 , '일지가 정인이면 헌신적인 부인의 내조를 받는다', '일간이 상생이면 궁합이 좋다' 등등. 그러나 짐 켈러의 주장처럼 무엇이든지 알고자 하는 것들의 핵심 원리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정해진 공식만을 외우는 행위는 운 좋게 몇 차례 적중하여 '족집게'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곧 한계에 부딪치고 맙니다.
사주 명리학의 본질은 '음양', '오행'과 '십신'입니다. 음(陰)은 어둡고, 차가우며, 무거움을 상징하며 대세에 따르는 실리적 기질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기질로 나타납니다. 양(陽)은 밝고, 따뜻하며, 가벼움을 상징하며 대세보다는 감정과 의지대로 행동하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기질로 나타납니다. 음양은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는 상대적 기질을 의미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 딱 두 가지 기준으로 분류(분절)된다는 의미가 아닌, 외향적인 사람은 내향적인 사람과 작용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외향적임을 알 수 있다(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오행은 서평 part- 1에서 설명한 에너지와 물질이 순환하는 원리입니다. 이처럼 생(生)이 순환의 원리임을 이해했다면, 극(剋)은 순환에 개입하는 원리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의성질(木)이 분자들이 강한 진동을 일으키며 중력(土)을 거슬러 솟구치려는 운동에너지라는 본질을 이해한다면, 땅에서 나무가 자라는 형상에 대하여 "토가 목을 낳는다고 하는 것은 왜 합리적이지 않은가?"와 같은 류의 의문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나무의 생명력(솟아오르려는 운동 에너지)이 땅(중력)을 가르는 이치를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오행 금(金)이 기온을 하강시켜 분자의 진동운동(운동에너지:木)을 방해하는 현상이 금극목(金剋木)의 원리임을 이해한다면, '쇠를 맞부딪치면 불꽃이 일어나므로 , 금생화(金生火)'라는 저서의 단순한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물(목의 운동에너지)에 찬물 한 바가지를 부으면(금의 기온을 낮추는 작용), 물 분자는 진동을 멈춥니다. 이재인 선생님께서는 물상으로 은유한 에너지의 순환을 실제 해당하는 물상(목, 화, 토, 금, 수)으로 이해하고, 이를 사주 공식(레시피)에 대입합니다. 이재인 선생님처럼 명리학 공부를 하면, 물상의 성질과 이미지에 갇혀 절대 에너지의 순환 원리를 ‘이해’(통찰)할 수 없으며, 짐 켈러가 말한” 레시피만 고집한다면 어느 순간 턱 막히는 때”를 마주하게 됩니다. 원리를 이해(통찰) 하지 못하니, 레시피에 집착하고, 레시피에 집착하다 보니 본질의 이해와는 점점 멀어지는 것이지요. 짐 캘러의 예시처럼 빵덩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발효, 유통, 물리학, 역학등의 모든 원리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포괄적 과정입니다.
현상을 관찰하고 그 속에 내재된 근원적 원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동양 학문이 추구하는 '이해와 통찰'이며, 이는 논리와 증명으로 반박하고 증명하는 성질이 아닙니다. 서양의 학문(특히 과학)은 논리와 증명, 실증적 결과로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분절합니다. 마치 토너먼트를 하듯 좀 더 나은 결과치를 경쟁적으로 도출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와 같이 기존의 논리(이론)를 논박하여, 그 전의 이론을 폐기(부정)하는 사고에 익숙해지면 논리의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학적 증명, 논리에 입각하여 증명된 가치 외에는 모두 폐기되어 마땅하다고 믿어 온 우리는 이제 스스로 이해하려는 능동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해(통찰)는 자신이 하는 일이지, 타인(논리)이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이재인 선생님께서는 댓글로 본인의 저서가 철저하게 저의 논리에 의해 논박당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주장이 논리로 반박당하기를 바라는 자세는 지극히 수동적인 행위입니다. 스스로 기꺼이 논리에 굴복당하기를 원하는 태도는 논리에 대한 숭배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특히 명리학처럼 학문이 내포한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고 전반적인 이해와 깨달음을 요하는 학문일수록, 논리로 타인을 굴복시키고, 굴복당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짐 캘러의 말대로 핵심을 이해할 수 없으니 레시피에 집착하고, 결국 이해(통찰)할 수 없는 나를 인정할 수 없으니, 학문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논리에 의해 수긍당하고자 하는 수동적 태도로는 '명리학(동양학문)'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재인 선생님의 댓글에 일일이 답변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사주 명리학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수많은 역술인들이 존경하는 故박재완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만 명의 사주는 봐야 물리가 터진다."
사주명리학의 핵심은 '인간'입니다. 십신은 오행과 더불어 명리학의 가장 중요한 본질로, 인간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근원적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순환 원리인 오행처럼, 오행의 생극 관계로 나타나는 십신 역시 순환합니다. 다만 십신은 인간이 사회성을 습득하며 성장하는 과정에 해당하므로 '순환'보다는 '진화'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입니다. 비겁이 갓 태어난 아이들의 원초적 생존 욕구(이기적 생존, 외부 경계심)이며, 비겁과 극(剋) 관계인 재성(財星)이 목표 성취를 위해 타인과 교섭하고 인맥을 형성하는 사회성임을 이해하려면 각각 비겁과 재성이 발달한 사람들을 치밀하게 관찰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비겁(比刦)과 재성(財星)의 본질을 이해하면, 과도한 비겁이 약한 재성을 극(剋)하는 군비쟁재(群比爭財)나 군겁쟁재(群刦爭財) 사주의 특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군겁쟁재 사주는 자아가 견고하여(비겁다) 타인과 협상, 교섭(재성약화)을 좀처럼 하려 하지 않으며, 도움이 되는 조언도 잘 듣지 않으려는 성향이 나타납니다. 군겁쟁재 사주에 비겁 운이 더해지면, 타인과의 관계성(재성)이 약화되어 인맥축소로 인한 사업부진(실패), 부부관계 악화(이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주목하셔야 할 사안은 절대 ‘군겁쟁재 + 비겁 운 = 사업실패, 이혼'과 같은 레시피(공식)가 아닙니다. 반죽과 이스트의 상호작용으로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발효 과학을 이해하는 것처럼, 비겁과 재성의 본질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명리학 공부의 핵심입니다. 만약, 본질을 외면한 채 명리학 공식에만 집중하면, 군겁쟁재 사주가 아닌 사람도 사업에 실패하거나 이혼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한 군겁쟁재 사주임에도 불구하고 이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므로, '사주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사주적 특징은 높은 확률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 수학적 산출값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간은 균일한 실험조건을 갖춘 실험실에서 결괏값을 얻는 물리학과 달리, 무수히 많은 변수들이 존재하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동일한 군겁쟁재 명주라 하더라도, 그분의 아내가 주관성이 약하여 자기주장이 없는 분이라면, 오히려 독선적인 남편(군겁쟁재)이 전혀 불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고유한 특정 기질을 갖고 태어나지만, 수없이 다양한 기질의 주체(타인)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므로, 필연적으로 가변성을 내포하며, 그러한 가변성 모두를 예측한 결괏값 산출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다만, 본질(오행, 십신)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예상된 결괏값(군겁쟁재 사주의 이혼)과 가변적 결괏값이 나오는 이유(배우자의 특이한 기질 등)를 수긍할 수 있습니다. 운명론자들이 명리학의 적중률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몰이해 때문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사주는 518,400가지 중에서 하나다. 사주명리학 이론이 유효하다는 북반구에 '나'와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의 수는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면 무수히 많다. 사주로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알 수는 없다. 사주명리학에 호의적인 학자들은 '범주화' 또는 '유개념'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주로 '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어떤 '나'를 말하는 것일까? 개성이 포착되지 않은 유형 집단의 구성을 '나'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도대체 '나'를 뭘로 보는가? 사주만 보면 그 사람의 모두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사주 귀신에 씌어서 이성을 잃은 자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 사주는 없다 P28
수치로 정확하게 산출되는 것을 선호하는 분이라면, 나의 체중, 키, 체질량 지수나 혈당 수치가 곧 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자신이 재림한 예수라고 주장하는 분도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무엇을 나로 규정하는지의 기준은 각기 다르지만, 우리는 나의 기질과 성격이 곧 '나'라는 것에 대해 거부감 없이 동의합니다. 심리학 기반의 MBTI가 유행하는 것은 나의 기질과 성격이 곧 '나'임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명리학도 사주(8글자)를 기반으로 '범주화' 혹은 '유형화'하여 해당 명주의 기질과 성향을 제시합니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나의 타고난 기질은 변하지 않지만(사주 8글자), 타인과 상호 작용을 경험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타인과 관계하는 경향성'은 반드시 변화(대운, 세운의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MBTI 검사도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다시 해보면, 이전과 다른 검사결과가 나오곤 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의 경향성이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그렇게 되고 싶은 '미래의 나'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 나일까요? 명리학을 배워 사주를 봐주며 "족집게"라는 찬사를 받았던 과거의 이재인 선생님은 '가짜 나'이고, 미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네임드들(강헌, 양창순, 고미숙)에게 호통을 치시는 현재의 이재인 선생님이 '진짜 나'일까요? 아니면, '사주는 절대 없다'나 '생각해 보니 심리학도 없다'와 같은 후속 편을 출간할지도 모를 미래의 이재인 선생님이 '진짜 나'일까요? '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에 이르는 고정적 기질과 가변적 경향성의 총합이 곧 '나'일 것입니다. 나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며, 이를 통합하려 노력하는 주체일 것입니다. 사주 원국이 내가 타고난 기질이라면, 대운은 나의 경향성의 변화를 살피는 시간별 차트인 셈이지요. 내가 누구인지는 나를 너무 가까이서 보면 알 수 없습니다. 사주라는 도식표가 나를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도구로 활용되면, 사주 분석을 통해 나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선생님의 우려처럼 '사주 귀신에 씌어서 이성을 잃은 자의 헛소리에 불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사주는 좋게 말하면 이론의 탄력성이 매우 높고 나쁘게 말하면 이현령비현령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아니겠습니까?" - 리뷰 1편에 남긴 이재인 선생님 댓글
이재인 선생님께서 공식(레시피)이 아닌, 인간(핵심)에 관심을 기울였던 분이라면,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명리학은 용신과 기신을 통하여 길흉을 판단하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길흉의 판단조차 지극히 주관적 가치이므로, 특정 사건을 기준으로 길흉을 판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보편적으로 아이의 출산, 결혼, 승진 등은 길한 일이고, 이혼, 실직 등은 흉한 일이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산한 아이가 희귀병을 갖고 태어나 평생 어머니의 돌봄이 필요하거나, 결혼은 길한 사건이지만, 결혼한 배우자가 폭력, 도박을 일삼는 사람이라면 그 결혼은 길함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혼은 흉사이지만, 배우자가 잦은 외도를 하는 사람이었고 소송을 통해 거액의 위자료를 받았다면 그 이혼을 흉사로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에게 발생하는 무수한 사건의 사례별 길흉 판단을 칼로 무 자르듯 규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길과 흉과 같은 이분법적 분별의 기준마저도, 논리에 의해 증명되거나 결정할 수 없는데, 사주의 적중률을 따져 이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겠다는 저자의 의도를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명리학의 적중률에 대한 논의는 이처럼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명리학에서 중점으로 살펴봐야 하는 사안은 10년 단위로 나뉘는 대운의 크고 작은 변화의 원인과 상태를 분석하면, 세운(해당 연도)에 명주가 어떠한 자세로 무엇을 준비하고, 혹은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재인 선생님의 주장대로, 적중률을 높여 명주를 공식에 끼워 넣어서 해당 명주가 죽음에 이를 만큼의 흉사가 닥칠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역시 명리학은 위대하고 신묘한 학문'이라는 찬사를 얻을 수 있을까요? 감히 말하건대, 설사 AI가 명리학을 통달하여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하여 인간의 미래를 100% 예측한다 해도, 우리는 그 결과를 절대 알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명리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명리학으로 전능한 권력을 얻고자 함이 아닌, 명리학으로 나와 타인, 즉 사람을 이해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주장이 철저하게 논박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야 저도 제가 한 공부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 - '사주는 없다. 리뷰 1'에 남긴 이재인 선생님 댓글
명리학 이론은 도식으로 산출되는 원리이기에, 누구든 몇 개월만 공부하면 용신 판단까지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합니다.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총체적 과정인 것이지요. 사주라는 도식표(명식)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는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지, 그것이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으며 적중률이 60% 인지 혹은 70% 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공부(도구)에 자부심을 가질 이유 또한 없습니다. 의사가 집중해야 하는 대상은 환자이지, 수술에 사용하는 메스(도구)가 아닌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도구를 숭배하거나 도구에 자부심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이재인 선생님은 명리학을 이론 공부만 열심히 하면 적중률 100%에 수렴하는 위대한 학문이라 생각했기에, 기대에 못 미치는 적중률에 화가 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재인 선생님을 운명론자로 판단한 이유입니다.
이번 리뷰는 왜 이재인 선생님처럼 명리학을 공부하면 안 되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앞선 설명처럼 명리학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며, 공부를 하는 우리의 관심은 도구의 완벽성이 아닌 인간에 대한 이해로 향해야 합니다. 다음 편(part-3)은 명리학 공부가 왜 인간을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뱀발
"그리고 출판사에서 붙여 놓은 ‘사주는 없다’라는 제목에 너무 큰 의미는 부여하지 마세요. ‘없다’라고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책을 읽으셨으니 아마도 아시겠지만, 저는 책 어디에서도 사주를 폄하하거나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문제 제기가 사주에 대한 폄하나 부정으로 읽혔다면 순전히 제가 글을 잘 쓰지 못한 탓입니다."
- '사주는 없다. 리뷰 1'에 남긴 이재인 선생님 댓글
이재인 선생님께서 모든 저서 리뷰에 반박 댓글을 작성하시는지 알 수 없으나,
혹여 이번글에도 반박의견이 있으시다면, 1편의 저의 주장에 대한 의견부터 말씀해 주시는 것이 순서라
여겨집니다. 독자들의 리뷰에 일일이 반박(논증) 하시는 것보다, 본인이 무슨 주장을 하고 계시는지부터 자문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사주는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시고, 책 제목은 출판사의 의견이며 본인은 사주를 폄하하거나 부정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시면, 독자들은 선생님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저자의 주장이 명백한 주장의 형태를 갖추게 되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