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서문의 마지막, 오웰의 말이다. 서문을 끝내고 소설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발목을 잡혔다. 웬걸. 서문을 쓴 이유가 대중들에게 이 사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저 문장을 이해 못 하면 1만 자의 서문을 헛읽은 것이라는 말이 아닌가. 나는 서문을 읽은 시간에 대한 아까움이라는 비루한 동기로 질문했다. 자유를 두려워할 수 있는 자는, 그리고 지성에 재를 뿌리고 싶어 하는 자는 어떤 자들일까.
오웰이 던져 준 저 질문에 ‘우리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두려워하며,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재를 뿌리려 들지 않을까’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저 문구가 내 머릿속을 강하게 때리는 것을 느꼈다. 오웰의 말을 ‘자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자유주의자이며, ‘지성’이라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들이 지성인이라는 것으로, 다시 말해, 자유에 대한 무지(無知)를 인식하는 자들이 자유주의자들이며, 지성에 대한 무지(無知)를 인식하는 자들이 지성인이라는 것이라는 말로 바꾸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웰이 당대의 자유주의자와 지성인들에게 자유와 지성에 대한 무지의 인식을 요구한 이유는 이것이라고 감히, 하지만 강하게 짐작해 본다.
「끊임없이 질문하라」
자유주의자는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올바른 ‘자유’의 관념을 형성해야 하며, 지성인은 지성에 대한 그것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질문을 통해서 무지의 상태를 해소할 수 있다. 질문을 통해서 사유라는 지적 노력을 할 수 있다. 무지에 대한 인식의 상태는 사유를 발생시키지만, 무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는 사유에 대한 지적 노력의 가능성을 마비시킨다. 사유의 마비는 상태의 주체를 눈감게 하고 귀를 멀게 한다. 눈을 감고 귀가 멀어버린 자는 어떠한 문제도 느낄 수 없다. 그리고 자연스레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될 것이다. 저 문구에서 오웰은 질문이 없어진 자유주의자와 지성인 집단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웰의 서문은 반세기 이상을 넘어와 질문이 마비되어 버린 현대의 나, 그리고 우리에게까지 그 통찰의 날카로움을 느끼게 하고 있다.
오웰이 진정 이것을 바랐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서문과 한동안 씨름한 나에게 동물농장이라는 소설은 질문이 결여된 자들이 당연히 실패하는 현상 중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졌다. 소설 속 피지배계층의 동물들은 동물농장의 지배계층인 돼지들이 만들어 낸 자유의 모습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혹은 질문의 답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그들 자신을 잘못된 자유 내부에 속하게 하고 이에 비합리적으로 적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돼지들은 달랐다. 자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정의를 내림으로서 ‘자유’의 모습을 주체적으로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소설 속의 모습은 내 머릿속을 한 번 더 강하게 때려줄 생각을 던져주었다.
「올바른 질문을 가져라」
나폴레옹을 비롯한 돼지들은 메이저 영감이 말한 ‘자유’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짐으로써 기형적인 ‘자유’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오웰은 당대의 사회가 가지고 있던 자유의 모습을 동물농장이라는 소설을 통해 비유하고 있었다.
드디어 오웰이 서문과 소설을 통해 내게 던진 생각을 손안에 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지 잘못 자리 잡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 혹은 부패한 권력의 모습 따위의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적인 것만을 보여주기 위해 쓴 소설이 아니었다.
「올바르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라」
올바른 질문은 올바른 답에 우리를 이르게 하고 올바르지 못한 질문은 우리를 올바르지 못한 답에 이르게 한다.
오웰이 내게 던져준 이 생각은 동물농장의 문제와, 내가, 또 다른 누군가가,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세계가 가진 문제들을 설명해 내기에 충분하다.
나는, 우리는, 세계는 오웰이 살던 시대의 ‘동물농장’이라고 여겨졌던 기형적인 자유가 오웰이 추구하던 것과 근사한 형태로 추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동물농장’ 속에서 살고 있다. 헬 조선으로 대변되는 한국사회의 병리를 비롯하여 전쟁, 환경 등에 대한 문제들이 우리의 동물농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올바른 질문에 대한 지적 노력의 결여가 불러올 문제가 비단 자유에 관해서만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가 ‘올바른 질문의 결여’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지 않는 이상, 새로운 ‘동물농장’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리라는 것을 추론해 내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관념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짐‘으로서, 우리를 더욱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만 한 것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어야 한다.
더욱 올바르게 탈바꿈된 개인의 관념들이 모여 더욱 올바른 사회의 관념이 될 것이고 이것들은 다시 모여 더욱 올바른 세계의 관념이 된다. 이것이 동물농장의 발생과 유지를 궁극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동물농장이라는 소설을 접하고 나는 이제 ‘수많은 나’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가 생겼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세계’를 위해 나와 함께 생각해주기를, 사유해주기를 바란다.
‘우리의 삶에, 우리가 속한 사회에, 우리가 속한 세계에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에 대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