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금 Mar 26. 2019

내게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

코펜하겐 SP34 호텔

7~10년 전쯤부터 '북유럽'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시작은 디자인업계였다. 2012년에는 핀 율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대림미술관에서 핀 율전을 기획했고, 비슷한 즈음에 다른 미술관에서도 '디자인 핀란드'전이나 '노르딕데이'전 등을 기획했다. '노르딕' 유행은 서점에서도 도미노처럼 번져 나갔다. 디자인 서적은 기본이고 여행 코너와 에세이까지,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모두가 북유럽에 대해 이야기했다. 


북유럽으로 향한 건 그즈음이었다. 또 한 번의 연애가 끝났고,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에 무서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종종 스스로를 낭떠러지에 떨어뜨린다. 스스로 호랑이 새끼를 만들려는 본능인지 어쩐 건지. 이 방법은 적어도 자존감을 높이는 데에는 꽤 효과적이다. 겁이 많아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일들을 해내면서 나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이때 내 미션은 지금 당장, 아무 계획 없이 떠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작정 회사에 2주 휴가를 내고, 북유럽으로 향했다.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들 틈에 있고 싶어서 택한 여행지였다. 스톡홀름 인 덴마크 아웃. 왜 그런 루트를 짰느냐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 그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일상도 여유로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호스텔이 아닌 호텔을 선택하는 이유  
2주간 스톡홀름과 코펜하겐을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취재가 아니었으니, 그저 나는 북유럽에서 먹고 자고 놀다가 오면 되었다. 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겁이 많은 내게는 꽤나 도전정신이 필요한 여행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나를 가장 괴롭힌 건 호텔비였다. 한 끼 먹는 것도 후달리는 북유럽인만큼 너무너무너무 비싼 호텔들. 혼자 떠날 때 가장 큰 단점이 숙소비를 나눌 동지가 없다는 거 아닐까. 여행 만족도가 '숙소'로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욕심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난 실연 상태 아닌가. 전전두피질의 폐업으로 모든 소비는 용인되었다. 호텔을 구경하다 보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북유럽은 디자인 천국 아닌가. 호텔이야말로 북유럽 디자인을 몸소 체험해볼 수 있는 모델하우스(?)인 격. 실제로 북유럽 호텔에는 유명 디자인 가구로 채워진 호텔도 있다. 하지만 가격이 어마무시. 가보고 싶지만 가격을 감당하기에 너무 무리인 곳부터 추려내고 십만 원대 호텔 중에서 북유럽의 간결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채워진 곳을 골랐다. 결론은 SP34였다. 


호텔보다 호스텔을 찬양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외국어가 유창하지 않고,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는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여행을 하고 돌아와 몸을 뉘일 때만큼은 아무것도, 아무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내 예산으로 갈 수 있는 호텔이 아무리 작고 후져도 말이다. 


네온사인은 언제부터 유행이었나 ©SP34
지나치기 쉬운 간판과 입구, 으리으리보다는 이런 소박함이 아름다워. ©SP34


공간을 채우는 조명, 조명이 건네는 위안    
15일간 5곳의 호텔을 묵었지만, 방은 하나같이 작았다. 일본에서도 익히 겪어본 좁디좁은 사이즈였지만, 북유럽의 호텔이 만족스러웠던 건 한 가지 이유였다. 바로 조명. 객실을 여러 개 간접조명으로 밝히는데, 형광등 불빛이 아닌 따스한 노란 불빛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평안함이 느껴졌다. 친오빠가 장가간 이후 내 짐이 오빠 방까지 잠식했을 만큼 맥시멀 리스트지만 처음으로 미니멀리스트도 괜찮다고 느껴졌다. 내 짧은 몸뚱이를 눕힐 수 있는 침대와 몸을 착 감싸는 좋은 침구 그리고 조명. 이렇게 세 가지가 충족된 공간에서 매일매일 충분히 평안하고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으니까. 나중에 내 집을 꾸밀 때 무엇보다 조명과 침대, 침구를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서점에서 왜 그렇게 북유럽을 찬양했는지 알겠더라니까. 


펜트하우스 룸 사진, 내 방은 통창 따윈 없었어 ©SP34
본 적 없는 베드 스타일과 꿀잠 부르는 침구류 ©SP34

밤과 겨울이 긴 환경 때문에 집 안을 편안하고 아늑하게 꾸밀 방법을 찾으면서 가구 디자인이 발전한 북유럽. SP34는 조명뿐만 아니라 그런 북유럽 가구의 담백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목공예가 발달한 만큼 제품 자체의 만듦새가 튼튼했고,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실용적이면서도 간결한 디자인. 그러면서도 공장에서 찍어내는 느낌의 천편일률적인 디자인도 아니었다. 혼자였지만, 둘보다 따뜻했던 건 조명과 침대때문이었으리라. 


실용성은 조금 부족할지라도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객실 안에 냉장고가 없다는 사실. 하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보겠다는 게 이별 후 내 삶의 자세였으므로 문제 되지 않았다. 객실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슈퍼에서 맥주를 잔뜩 사들고 돌아온 나는 그냥 얼음을 요청했고, 세면대를 얼음과 찬물로 채워 냉장고로 사용했다. 그냥 그런 상황에서도 혼자 낄낄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호텔에서 자전거 렌트를 할 수 있다. 1일 150 DKK (안장이 높아서.. 호빗은 힘들었다) 


그렇게 호랑이 새끼는 또 살아 남아 돌아왔다  

기골이 장대한 북유럽 아티스트 사이에서 자전거를 끌며 그들의 작품을 기웃거리고, 세계에서 가장 예약하기 힘든 레스토랑인 노마의 세컨드 레스토랑 격인 '라디오(Radio)'에서 코스요리를 즐기기도 하고, 밤에는 대대손손 추억을 만들었을 175년 된 놀이공원 티볼리에서 혼자 놀이기구를 타기도 했다. 밤에 혼자 탄 관람열차에서 나는 득음을 했고, 제발 멈춰달라고 사정해 멈추기도 했다. 생사의 기로에 서자 영어가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놀이공원에서는 끝까지 태워주지 못했다며 환불까지 해줬다. 그냥 내가 겁이 많았을 뿐인데. 마음이 서늘해져 떠난 여행이었는데, 북유럽의 기운이 따뜻하게 채워줬고 적당히 거리 두며 나를 대하는 사람들도 오히려 반가웠다. 너무 가까운 사이는 오히려 번잡하니까.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는 여행 같았다. 두 가지는 배웠다. 혼자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별거 아니네. 그리고 조명, 침대, 침구는 꼭 좋은 거 사야지. 북유럽 브랜드로! 





매거진의 이전글 디즈니랜드에서의 일주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