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험에 가입한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보험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다. 내가 어렸을 적, 이미 엄마가 일생동안 필요할 보험을 모두 들어놓으셨기 때문이다. 엄마는 보험전문가였다.
내가 9살 때, 아버지가 쓰러지셨고 서울에 살던 우리 가족은 시골로 내려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건강이 안 좋은 몸으로 농사를 지으셨고, 살림만 하시던 우리 엄마는 이모를 따라 보험설계사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빌려 짓는 농사가 얼마나 돈이 되겠는가? 엄마가 실질적인 생계를 책임졌다.
어느 겨울날, 엄마가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게임인 <디아블로 2>를 사주셨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하셨다. 그날은 크리스마스가 아니었지만, 나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동생과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세월이 흘러 나는 회사에 다니게 되었고,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종종 보험설계사 분들이 영업을 하러 오시곤 했다. 어느 날 어떤 선배 하나가 보험설계사 분에게 호통을 쳤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오면 어떻게 하냐는 이유였다. 직장인들에게 점심시간은 1분도 빼앗길 수 없는 정말 중요한 시간이긴 하지만 나는 그 선배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사무실에서 쫓겨나듯이 퇴장하였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녀를 회사 인근 가방가게에서 목격하였다. 그녀는 예쁜 책가방을 손에 쥐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20여 년 전 그날, 왜 게임을 사주셨는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