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트렌디한 유통업계는 촌스러운 나와 영원히 접점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난사한 서류 중 덜컥 통과한 곳 중 하나가 백화점이었다. '전공무관+신입'을 받아주는 곳이라면 우선 지원하고 봤기 때문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면접을 위해 후다닥 업계와 기업에 대해 공부해 보니 재밌게 느껴졌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니 환경의 변화에 따라 휘청거림이 크다는 단점이 있지만 의외로 인문학 전공을 조금이나마 써먹을 수 있는 분야 같아 더 욕심이 났다. 그렇게 벼락치기를 하고 면접날이 다가왔다. 면접 대기실에 들어가니 온통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지원자들이 앉아있었다. 번호 순서대로 조가 짜여서 차례로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나는 다행히 첫 번째 조였고 대기 없이 면접을 볼 수 있었다. 한 조에 여자 두 명, 남자 두 명으로 면접자는 네 명이었고 면접관은 세 명이었다. 면접 직전 출신학교에 대해 언급하면 불합격이라고 신신당부하는 게 좀 웃겼다. 지원서에서는 어차피 다 봤을 거면서…
면접관들은 대부분 물어볼 만한 합리적인 질문을 했다. 회사의 인재상 중 하나를 골라 자신을 소개하라든지, 직무 관련 경험은 무엇이 있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 등등. 그 짧은 시간에도 지원자 간 역량차와 말발(?) 차가 두드러졌다. 내 옆에 앉았던 교육과 전공 후 HR 인턴을 해본 여자 지원자는 왠지 붙었을 거라는 느낌이 왔다. HRD 쪽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하면서도 HRM과 HRD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어찌어찌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술술 할 때 면접관이 좋아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HRD 이야기를 하면서 고작 교육봉사 정도의 경험만 이야기한 나와는 비교가 됐다. 내가 인사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은 경험이었다.
남자 지원자들이 대체로 면접을 잘 못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좀 더 자기를 꾸며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텐데 역량의 전부를 못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물론 여자치고 말을 못 해서 면접을 늘 말아먹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실무와 관련 없는 군대 경험을 계속 꺼내는 지원자의 차례에 면접관들이 대놓고 무시하며 싫은 티를 낼 때는 내가 다 민망했다. 저렇게까지 모욕을 줄 필요가 있나 싶었다. 부모님에게 이 말을 꺼내니 면접에 몇 번 들어가 본 아빠도 적극적으로 동감하며 여자들이 면접을 훨씬 잘 본다고 했다. 그래서 윗선에서는 남자를 일부러라도 더 뽑으라는 지령이 내려온다고 했다. 엄마가 발끈하며 그럼 여자를 훨씬 많이 뽑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성차별이라 했다. 아빠의 말로는 면접에선 여자들이 잘하는데 막상 입사 후 퍼포먼스는 남자가 낫다고 했다. 비교적 약한 체력 문제인지 아니면 임신 출산 때문인지, 혹은 군대에서 학습하는 '까라면 까' 정신이 없어서인지 모르겠다. 씁쓸한 현실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길에 지원자끼리 짧게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말을 잘하던 여자 지원자가 여기서도 대화를 주도했다. 나를 보고 배낭여행 이야기에 감명받았다고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참 친화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혹은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사회생활일지 모르겠지만, 면접장 바깥에서도 열심이었다. 한 남자 지원자가 나와 같은 국문과를 나왔길래 내심 반가웠다. 역시 백화점 쪽이 문과 졸업생들의 희망이긴 한가 보다. 무사히 끝내고 면접비 3만 원을 수령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정오 무렵이었다. 내리쬐는 햇볕은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정장에서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따릉이 하루권을 빌려 한가로운 한강공원을 달렸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이번 면접은 괜찮았다고 만족하면서도, 불쾌하지 않은 면접에 감사해야 하는 처지가 서글펐다. 그 시절엔 이미 면접장에서의 미묘한 무시와 공격에 두려움이 생긴 상태였다. 아직은 아무런 관계없는 젊은 사람들에게 벌써부터 갑질을 하려 들던 몇몇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지원자를 인격체로 존중하면서 적절한 질문을 하는 면접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슬픈 건 대기업이나 유명한 회사의 면접장에나 가야 그럭저럭 괜찮은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이었다. 원래부터도 좋은 회사만 평판을 신경 쓰면서 갈수록 발전해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평균임금도 두 배씩 차이가 나니, 돈이든 사람이든 중소기업에 가도 괜찮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노비도 대감집에서 해야 한다는 MZ의 슬픈 자조에는 어떤 과장도 없다. '아직도 이런 회사가 있다고?' 하는 현타를 느끼게 하는 직장에 가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게 아니라는 외침이, 단순히 눈이 높아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