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후로 예정되었던 최종 면접이 미뤄졌다. 회사 내에 코로나 유행이 한 번 돌았다고 했다. 일정이 미뤄진 덕에 다른 회사 면접과 겹치지 않고 준비도 여유롭게 할 수 있었다. 면접 당일 집을 여유롭게 나왔지만 엘리베이터도 지하철도 도와주지 않아 속이 터졌다. 종각역 도착해서도 헤매다가 겨우 화장실을 찾아 면접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급해서 스타킹은 제대로 신지도 못했다. 내가 제일 늦게 왔는지 다른 지원자들은 모두 대기장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우선 여자들만 가득해서 깜짝 놀랐다. 경험상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비교적 면접을 잘 보길래 내심 내 경쟁자들이 남자기를 바랐는데, 약간 긴장됐다. 도착하자마자우황청심원을 마시던 중 저번에 본 인사 담당자가 대기실에 들어왔다. 그마저 구면이라고 반가웠다.앞 지원자들의 면접이 길어져 30분 정도 미뤄줬고, 1차 면접보다 짧을 것이라는 안내가 무색하게 최종면접은 장장 1시간 15분가량 진행됐다.
순서가 되어 다시 그 중후한 회의실로 들어가자 저번 면접 때도 본 인사팀장, 그리고 공동대표인 회장 두 명이 모두 와있었다. 임원이라도 기껏해야 이사나 상무 정도가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회장이 있어 당황스러웠다. 생각보다 평범한 할아버지들이었다. 인사팀장도 회장 옆이라 이야기하기 어려운지 시작할 때 면접자 소개와 마지막 하고 싶은 말 등의 순서를안내할때 빼고는 듣기만 했다. 임원 면접은 다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지원자 개인 정보를 다 말해줘서 1차로 놀랐고 다들 학벌이 좋은 편이라 2차로 놀랐다. 신입사원 공채인데 다들 경력도 화려해서경력이 아무것도 없는 지원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소개말이 “구직 중이시고요." 한마디로 끝나는 게 뻘쭘했다.만 나이로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나이는 많으면서 다른 지원자들과 다르게 아무런 경력이 없어 부끄러웠다. 이 상황을 두고 보니 여기까지 내가 온 게 신기할 정도였다.
면접의 시작인 자기소개는 내가 가장 어려워하던 항목이자 몇 번의 면접을 거치면서도 별 발전이 없는 항목이었다. 그나마 마지막 순서라 다른 지원자들의 자기소개를 지켜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지원자가 “BTS! Born to Sale! 팔기 위해 태어난 지원자 000입니다!”라고 우렁차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듣자마자해운영업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없이 유튜브로 준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나 또한 대단한 지식은 없지만) 들었다. '팔기 위해 태어난'이라는 수식어는 B2C에 어울리고 더욱이 나이 지긋한 회장들을 상대하는 최종 면접에서 먹힐 만한 소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외워온 스크립트가 있을 텐데 그대로 할 수밖에. 엄숙한 분위기에서 그 말을 외친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회사마다 차이점도 많은 임원면접을 알아보면서 어떤 막막함을 느끼던 차에, 유튜브를 뒤지다가 ‘면접왕이형’보다 훨씬 괜찮은 채널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내가 최종적으로 만든 자기소개는 그것과 달랐지만 무슨 내용을 써야 할지의 가이드라인을 보여준 것 같다. 다행히도 임원면접은 내가 어필할 수도 없는 직무 경험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유튜브 내용 중 정말 도움이 됐던 게, 한 분야에서 정상을 찍어보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신입 지원하는 사람들 정도의 경험이나 능력으로 크게 감흥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유치원생이 뭘 했다고 자랑하는 걸 듣는 것처럼 우스워 보일 수도 있을 거라 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로 느껴져서 되지도 않는 성공경험 말하지 말고 나의 특성에 대해서 겸손하게 말해보기로 했다. 거짓 하나 없이 그나마 내가 나에 대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점,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 쓰일 수 있을 범용적인 장점을 두 개 골라서 면접날 아침 자기소개를 완성했다. 첫 번째는 학벌과 학점으로 증명하는 성실함/책임감이었고, 두 번째는 여행으로 기른 배움의 자세와 겸허함이었다. 그소개를 듣고 회장 2는내 얼굴에 “성. 실.”이라고 써 있다고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자기 나이쯤 되면 얼굴만 봐도 사람이 보인다며. 농담이라 그런지 말투가 원래 그런지는 몰라도 좀 거칠어서 좋게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말이었다. 그래도 얼굴에 “뺀. 질.”이라고 써 있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소개를 무사히 마치긴 했는데 모든 지원자가 소개를 마친 짧은 정적 사이 나를 계속 노려보던 회장 2가 나를 첫 번째 공격의 타깃으로 정했다. 소개 순서와 맞지 않아서 내가 유독 맘에 안 들었나 하고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다. 내 자소서를 30분 동안(도대체 왜?) 읽어봤는데 이해가 안 간다고 해서 어떤 이유로 시비를 거는 건지 어리둥절하고 무서웠다. 여기를 왜 지원한 거냐며, 요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드라마도 있는데, 이런 걸 만드는 게 본인의 전공이나 자소서 써놓은 거에 더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나쁜 말을 하려는 건 아니고 나도 딸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해운업이 굉장히 거칠어요, 본인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게 어떻겠어요?" 그 말을 들을 때 반쯤은 떨어지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실 1차 면접 때도 들은 말이었다. "업계가 좀 거칠고 한데, 물론 육상직에는 여자 직원도 많아서 그렇게 적응이 어렵지는 않겠지만… 괜찮겠냐"고 물어본 적이 있던 것이다. 방송 쪽을 생각해 본 적이 없냐는 말은 이전 면접 때도 들었지만 이번은 실무진이 아니라 임원 면접이니까 좀 다른 대답을 했다. “네, 말씀하신 것처럼 제 전공에도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방송 쪽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이건 주관적인 기준일 수 있어도, 방송 업계에서 창출하는 부가가치보다 해운업이 기간산업이자 단위가 큰 산업으로서 개인이 해낼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되어서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큰 일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구석탱이에 쓰여 있는 내 좌우명 보고도 핀잔인지, 아니면 조언인지 모를 말을 했다. 사실 좌우명 따위 없이 막 사는데 서류 제출 시 안 적으면 다음 단계로 못 넘어가길래 대충 써놓은 "The best is yet to come."이면접 질문이 될 줄은 몰랐다. “지원자에게 이 best라는 것이 뭔가? 왜 최고라는 게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지엽적이고 철학적인 걸 물어볼 줄이야. 하지만 난 전공에서 매번 하는 것이 이런 대화였다. “저는 아직 그 ‘best’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정해 놓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아직 경험도 적고 어리기 때문에 어떤 것이 최고이다, 하고 미리 정해놓으면 그것이 제 한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best의 의미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정해지지 않은 최고의 순간도 아직 더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쯤은 궤변처럼 말한 것을회장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다.
계속 먹잇감을 찾던 회장 2는 어떤 지원자에게 모욕성 발언일 수도 있는 말을 했다. 여기저기 경력을 옮겨다닌 걸 보고 하는 말이 “남자친구 사귀어 본 적 있어요? 오래 못 사귀지 않았어요?”하는 것이다. 경력은 경력이고 연애는 연애지 정말 저건 선 넘었다 싶었다. 그러곤 세 번째 지원자의 인적성 결과표를 보더니 꼬투리를 잡았다. 이 육각형이 균형 잡히고 통통한 모양을 좋아하는데 해당 지원자는 보시다시피 치우쳐 있다고 그랬다. 그러다가 다시 공격 대상이 나로 바뀌었다. "지원자 전공이 국문과라고 했지? 올해 2월에 졸업했다고 했나?(또 전공 공격인가? 아니면 공백기에 대한? 어느 쪽이든 답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동기가 몇 명이 졸업했나?"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강 50명 정도가 한 기수였던 기억이 나 대략 50명이라고 대답했다. "그중에 몇 명이나 취업했나?"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도 많고 많이는 취업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 전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뭐라고 볼멘소리를 했는데 이미 졸업한 걸 어쩌라는 건지 자꾸 전공을 끌어와서 난감했다. 국문과를 졸업했는데 하는 일이랑 잘 맞을 것 같냐는 질문을 또 받아서 속으로 한숨 쉬고 그럼 굶어 죽는 과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냐는 솔직한 대답을 마음속으로 했다. 물론 국어 관련한 지식을 배우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배웠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나마 전과를 해서 무난한 전공 졸업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경영 경제보다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어른들이 잘 아는 전공이고 범용성 높은 인문학이니...
계속 공격해오던 회장이 갑자기 달래듯이 '첫 단추가 중요한데 이런 거친 일을 해도 되겠냐, 자신도 딸이 있어서 걱정되는 마음에 하는 말이다'라는 말을 할 때는 마음이 흔들렸다. 나도 늘 해오던 고민이었다. 누구에게나 이름을 대면 아는 대학교를 나와서 이름을 모르던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지만 부모님이나 나를 믿고 응원한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나중에 더 좋은 직장을 가기 힘들어서 후회가 되지는 않을까?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대답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말이 많은 회장이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계속 나에게 걱정 어린 훈계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면접자들보다 면접관이 더 말을 많이 한 것 같다. 나에 대해서는 자꾸 인성 질문만 들어온 것 같아 면접 끝나고 나서 걱정이 되었다. 다른 지원자에게는 일 관련 질문도 많이 하던데(물론 지원자 자신도 그런 쪽으로 많이 몰긴 했지만) 나에게는 일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임원면접은 처음이다 보니 전혀 감이 안 잡혔다.
회장 1은 조용히 있다가 회장 2가 실컷 떠들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자 지원자가 많아서 감회가 새롭다고, 자신은 여성이 능력도 좋고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했다. 지금 면접하고 있는 네 지원자의 공통점도 거의 해외 주재원 경험이 있고, 학점이 4.5 기준 4.0이거나 거의 거기에 수렴한다고 했다. 하지만 임신이나 출산 이런 문제 때문에 더 감내할 게 많아서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좋은 것이 아니겠냐는 꼰대 발언을 들으며 겉으로는 웃는 얼굴, 초롱초롱한 눈을 유지하긴 하면서도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이제 시대가 바뀌긴 했나보다. 예전에는 자기 자신보다 조국이 중요한 사람이 정말 많았는지도 모르지만, 이젠 내가 없으면 세상이 없다는 그런 가치관이 우세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