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바닷바람에 그을린 새까만 얼굴과 몸은 누가 봐도 제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바래진 메리야스 아래로 흘러내리는 바지를 벨트가 간신히 움켜쥐었고 닳아 빠진 장화의 구멍 사이로 스며든 바닷물은 “저벅저벅” 걸을 때마다 소리를 냈지만, 아랑곳없이 뻘 속 숨겨진 낙지를 찾아다니던 불굴의 바다 사나이. 황금산 앞바다 그곳에 가면 “마흔의 아빠”가 있었다.
낙지 구멍이다 싶으면 삽질을 시작해 승부를 걸었다. ‘허탕이네.’라는 생각이 들 때 그즈음, 쫓아오는 속도를 못 이긴 낙지가 제 다리 끝을 보이면 재빨리 삽질로 퍼 올렸다. 잡힌 줄도 모르고 삽 위 뻘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온 낙지는 6월 뙤약볕의 뜨거운 맛을 보았다. 스티로폼 뚜껑이 열리고 냉동고 속 밤새 얼려진 페트병 위로 던져진 낙지는 온 힘을 다해 탈출을 시도해 보지만 소용없었다. 그제야 아빠는 한동안 숙였던 허리를 펴고 적당히 녹은 페트병 속 얼음물을 들이키며 밀려오는 바닷물을 바라보았다. 운이 좋을 때는 스티로폼 박스가 잡힌 낙지로 가득 찼고, 그렇지 않은 날은 헛삽질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절이나 물 때 따라 잡히는 양은 다른데, 당시 우리 가족의 유일한 수입이 낙지이었으니 말이다. 차오르는 바닷물을 뒤로 하고 못내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의 무게를 그때의 나는 헤아릴 수 없었다. 밤이 되면 화끈대는 그을린 피부와 욱신대는 근육통으로 뒤척이기를 여러 날. 살갗의 허물이 벗겨지고 아물고를 수 없이 반복하며 그렇게 제 살 색깔도 잊어버린 바다 사나이는 날이 밝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구부정한 몸을 이끌고 다시 황금산 앞바다 품으로 안겼다.
굴뻑과 돌이 유난히 많은 황금산 앞바다 한가운데에는 유일하게 맨발로 뛰어놀 수 있는 모래사장이 있었다. 무릎 위 넘실대는 바다 도랑을 두어 번 넘고, 돌무더기를 한참 헤치고 나아가야 다다를 수 있는 바닷가 속 오아시스. 그렇지만 밀고 들어오는 바닷물에 둘러싼 도랑부터 물이 차기 시작해 조금만 때를 놓치면 빠져나올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는 곳. 낙지잡이가 시원치 않은 날 아빠는 못으로 각목을 연결해 철사 줄을 이어 만든 끌개를 가지고 종종 이곳으로 향했다. 한 손엔 끌개와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를 힘껏 들어 올렸다. 땀과 바닷물로 축축해진 아빠 품에서는 크고 작은 돌도 거침없고 깊이를 가름할 수 없는 도랑물도 두렵지 않았다. 끌개로 모랫바닥을 긁어 나가면 신기하게도 몇 걸음 가지 않아 “덜커덕” 소리를 내며 주먹 만 한 크기의 백합 조개가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끌개를 메고 앞서나가던 아빠와 맨발로 고운 모래 위를 뛰어다니며 조개를 주워 담던 나. 어떤 신나는 놀이와도 비할 수 없는 즐거움이 황금산 앞바다에 가면 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겨울 아침, 소란스러움에 잠이 깼다. 눈을 비비며 나와보니 새벽 바다에 다녀온 아빠 주변으로 붉은 고무 대야가 몇 개씩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펄떡이는 숭어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퍼 담기지 못한 것들은 밑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동안 앞마당에 쌓여 있던 그물의 찢어진 틈을 사이사이 깁고, 말라비틀어진 탑새기를 털어내더니 드디어 제값을 한 모양이었다. 숭어는 떼로 다니기에 오가는 길목에 잘만 설치하면 괜찮을 거라는 아빠의 기대는 그 정도를 넘어서 대박을 터트린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모여든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팔기도 했다. 썰물에는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가 그물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숭어들을 더 잡아 왔지만, 밀고 들어오는 바닷물 때문에 양껏 빼내 오지 못해 내내 아쉬워했다. 한동안 온 집안에 숭어 비린내가 진동했고, 동네 사람들로 북적였다. 별 기대 없이 나선 어스름한 새벽 겨울 바다, 그물에 걸려든 반짝이는 숭어 떼를 마주했던 그 가슴 벅찬 순간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읊는 아빠의 인생 레퍼토리가 되었다.
배 타는 것을 반대하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아빠는 결국 선주가 되었다. 밀고 들어오는 바닷물에는 속수무책이던 바다 사나이가 이제는 황금산 앞바다를 발판 삼아 밀물과 함께 드넓은 서해바다를 누비게 된 것이다. 일할 인부들을 꾸리고 만선과 안전을 비는 고사도 지내니 제법 그럴싸한 선주 같아 보였다. 배에 여자를 태우면 재수 없다는 속설에 언니와 나조차 한번을 태우지 않았을 만큼 아빠는 대영호에 진심이었다. 출항 허가가 떨어지면 날씨, 계절 관계없이 늘 조업에 나섰고, 그렇지 않을 때는 배 점검과 그물 손질로 쉴 새 없는 시간을 보냈다.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바라만 봐도 배불러 하던 아빠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대영호는 드넓은 서해바다의 만선을 선물하는 대신 엄마의 우려를 현실화 시켜주었다. 만선은커녕 기름값도 못하고 돌아올 때가 잦아졌고, 힘들다고 연락 없이 잠적하기 일쑤였던 인부들로 출항이 미뤄지고 설상가상 잦은 고장에 수리비만 늘어 갔다. 나중엔 인부를 부릴 수 없어 혼자 조업에 나섰다 돌아가는 통발 기계 줄에 발이 걸려 바다에 빠지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차차 나아지겠지.’라는 미련은 우리 형편을 날로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버티지 못한 바다 사나이는 3년여 만에 선주 자리를 내놓았다. 배를 되팔아 빚잔치를 했음에도 빚 청산에는 턱 없이 부족했고 그 뒤로도 오랜 기간 우리 가족을 힘들게 했다. 바다 사나이 인생에 스치듯 짧았던 대영호는 그의 청춘이 고스란히 녹아 있던 황금산 앞바다를 도망치듯 빠져나올 수밖에 없게 한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휑한 머릿속 감추려 곱슬곱슬 볶은 머리카락은 적당히 풍성해 보였고, 오랜 세월 갯일을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뽀얀 피부는 넓은 바다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엄마는 몸이 아파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도 짬이 나면 황금산 앞바다로 향했고, 갯일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나에게는 오랜 기다림과 인내심이 필요했지만 엄마와 늘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따라나섰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갱변에 도착하면 빵과 우유가 담긴 검정 봉지를 내 손에 쥐어 주며, 멀리 가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고 바다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엄마의 바구니가 채워지는 동안 얇은 물가 돌을 뒤집어 숨어 있던 작은 게들을 잡아 소꿉놀이하다 시시해지면 가져온 우유와 빵을 먹었다. “엄마, 이제 가자.” 짜증과 울음 섞인 내 외침은 언제나 엄마에게만 닿지 않았다. 코 앞까지 바닷물이 밀고 들어오면 그제야 자리 털고 일어나 차오르는 바닷물에 뻘 묻은 바구니를 힘껏 흔들어댔다. “싸라락 싸라락” 듣는 귀마저 시원해지는 소리에 바지락이 실한 자태를 드러냈다. 갯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운이 좋으면 동네 경운기나 트럭을 얻어 타고 그렇지 않으면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걸어가야 했다. 비록 엄마의 돌아가는 길이 고단했을지라도 가득 찬 바구니가 주는 기쁨은 컸다. 작은 칼로 껍질을 벌려 발라낸 바지락살은 우리집 밥상에 오르거나 동네 부식차가 들어오는 날 팔아 과일이나 반찬거리를 사는데 소소하게 보태졌다.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바지락 대신 굴을 따러 갔다. 사방이 뚫린 겨울 바다 매서운 추위는 무던한 엄마에게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고 이 시기에는 아빠가 지게로 한가득 굴뻑을 실어 집에 날라주었다. 빨간 고무 대야 안에 제법 큰 돌덩이를 놓고 조새로 쪼기 시작하면 쌓여 가는 껍질만큼 집안은 뽀얀 굴 알맹이의 비릿함으로 채워졌다.
어디로인가는 흘러가야 하는 바닷물처럼 우리의 시간도 무심하게 흘렀다. 어느덧 팔순을 앞둔 바다 사나이와 그 사이 세상을 떠난 엄마, 그리고 청춘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열 살 소녀. 우리 모두의 지난 계절에는 늘 황금산 앞바다가 있었다.
마흔의 아빠와 엄마, 그리고 천진난만한 열 살 소녀가 그리울 때면 나는 가끔 그곳을 찾는다. 소녀를 키운 것은 8할이 황금산 앞바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