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에서 전우가 되다

당신과 나의 이야기

by podong

때는 바야흐로 18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음 고생하며 힘들게 떠나보낸 연인을 뒤로하고 누군가를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허나 시간이 흘러 하나, 둘 짝 찾아가는 동료들을 보며 '나도 다시?'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언니로부터

남자 좀 만나보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내가 아는 착하고 아주 남자다운 총각이 있는데 주변에 좋은 아가씨 있으면 소개 좀 해줘요."

"어멋! 제 동생 혼자인데 자리 한 번 마련해 볼게요."

조카 데리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던 언니는 오며 가며 가볍게 인사정도만 하던 같은 라인 아주머니와의 관계 확장에 나를 등장시킨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개해주는 사람이나 소개받는 사람이나 참으로 성의 없었다.

착하다는 것은 상대 아주머니의 매우 주관적인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고, 외모에 대해 별 말 없었던 이유는 만나보니 알겠고, 심지어 남자답다는 것은 어떤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인지 지금도 궁금할 따름이다.

조카 본다는 핑계로 주말만 되면 언니네 집에서 뒹굴거리던 내가 걱정이었는지 귀찮았는지 아무튼 등 떠밀려 나간 자리에 잠시나마 '혹시' 했던 기대는 한순간에 '역시'가 되어버렸다.


작은 키에 힙합 바지, 손에 든 클러치는 무슨 조합인지, '쿵쾅쿵쾅' 차 안의 음악소리까지 한마디로 정신없었다.

어디 동네에서 좀 놀아본 그렇지만 전혀 위화감 들지 않는 쬐깐한 양아치 형님 같은 그는 어떻게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부사관이 되었는지 자신만의 역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렀다.

이른 저녁을 사준단다.

뭐라도 빨리 먹고 집에 가고 싶었다.

아무거나 먹자는 말에 회를 사준단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먹지 못하는 나의 유일한 메뉴 날것의 회.

날것과 비린내의 조합인 회는 나에게는 정말 쥐약인 메뉴이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건대 까탈스럽게 굴지 말자는 생각에 꾸역꾸역 먹었다.

그리고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앉아 있기 어려워 맥주의 힘을 빌었다.

어떻게 언니집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깨어보니 방이었고 어젯밤 내내 변기통을 붙잡고 있었단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 남자였다.

일어났으면 영화를 보잔다.

'하.... 난 당신이 싫어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이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비 와서 영화 보기 어려울 것 같아요. 다음에 봐요."

때마침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고 만나기 싫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야외 영화도 아니고 영화관에서 보는데 비 오는 거와 관계가 있나요?"

"네?. 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에 말처럼 비 오는 거와 영화 보는 것은 관계가 없다.

'하지만 내 말의 의미는 그게 아니잖아요. 다시 만나기 싫다는 뉘앙스. 모르겠어요?'

그렇다.

이 사람은 말로만 듣던 모솔이었던 것이다.

연예 경험 완전 무(無).

그러니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연애 눈치라고는 1도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옆에서 듣던 언니가 옆구리를 찔러댔다.

소개해준 분한테 미안하니 딱 3번만 더 만나봐 달라는.

성화에 못 이겨 그렇게 숙취도 깨지 않은 상태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적벽대전 상(上)"

심지어 영화 장르도 눈치가 없다.

러닝타임은 또 왜 이렇게 긴지.

영화 끝나고 밥을 먹잖다.

진심 집에 가고 싶었다.

눈치 못 챙기고 깡다구 있게 모든 걸 리드한다.

그렇게 끌려간 곳이 피자집.

숙취 가득한 속에 느끼한 피자를 집어넣으니 무슨 조합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검도를 배우는데 하계 수련회에 나보고 같이 가자는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네?, 제가 왜요."

"그냥 같이 가는 거죠."

이 무슨 의식의 흐름인지.

아마도 2번 만난 것을 우리가 썸을 타거나 사귀는 첫 단계쯤으로 착각했나 보다.

더 이상 안 되겠다.

헤어지고 난 후, 나름 정중히 그렇지만 알아들을 수 있게 더 이상은 연락하지 말자는 의사를 전달했다.

질질 매달릴 줄 알았던 남자는 생각보다 너무 쿨하게 알겠다고 잘 지내라며 연락을 마쳤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끝이 난 줄 알았다.

몇 달이 지난 시점 뜬금없이 잘 지내냐는 연락이 오고, 밥 한번 먹자 해서 만나면

'아.. 역시 아니구나..' 연락 끊었다가..

잊을만하면 또다시 연락 와서 밥 먹고..

'정말 아니구나.." 연락 다시 끊고.


외로울 때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아무 하고나 연애하지 말라던 그 진리에 가까운 말을 머리로만 알고 실천에 옮기지 못한 나는 그와 지금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고 있다.

결혼해 살다 보니 행복했던 날 보다 지지고 볶고 후회하는 날이 더 많았음을 인정한다.

저 남자를 만나 내 인생이 억울하고 속상하게만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택의 옮고 그름을 떠나 그를 옆에 둔 것은 나의 결정이었다.

물론 결혼 전까지라는 전제하지만 사랑과 관심이라는 손길로 내 외로움을 어루만져 주었고 까탈스러운 성격을 무던히 참아주었다.

한 해 한 해 지나 스무 해가량 지내다 보니 '나만 손해 보는 결혼은 아니었겠구나.' 싶다.

모자란 부분을 탓하기보단 채워주고 인정해 주며 '최고야'를 외쳐주는 마누라를 만났더라면 그도 지금보다 더 어깨 펴고 살지 않았을까.

어느새 우리 사이에 흐른 시간만큼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도 유(柔)해지고 있다.

사춘기라는 긴 방황 속에 허우적대는 아이들과 맞서 싸우는 요즈음 내가 상처받고 힘 빠지면 그가 나선다.

그가 든든하단 생각을 얼마만에 해 보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사춘기라는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있는 전우로 서로를 연민 가득한 마음으로 품고 있는 중이다.

"오빠! 한번 전우는 영원한 전우.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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