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1화 함지박 속 비린내 (1)


102번 버스 안은 숨 막히는 열기로 뒤덮여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선풍기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헐떡이며 돌아가고, 사람들의 부채질은 뜨거운 공기를 더 부풀렸다. 땀 냄새와 휘발유 냄새가 한데 엉켜 콧속을 찔렀다. 문득, 조금 전 지나 온 양평동 진로 소주 공장에서 풍기던 고구마 주정 냄새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영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놈의 버스, 어서 내려야 하는데...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오목교를 훌쩍 지나쳐버렸다. 파란 모자를 머리에 핀으로 고정한 안내양이 목소리를 높였다. “오라잇, 다음 내리실 분 미리 준비하세요” 그 소리가 마치 꾸짖음처럼 들렸다. 영석은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창밖만 바라보다가 오목교에서 세 정류장을 더 지난 뒤에야 비로소 버스를 내렸다.

영석이 내리고 버스 문이 닫히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훅하며 한 덩어리로 얼굴을 덮쳤다. 흙먼지가 바람에 섞여 콧속을 파고들었다. 영석은 고개를 숙이고 골목으로 몸을 숨기듯 들어섰다. 마치 누군가의 눈길을 피해 쫓기듯 그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그는 늘 이랬다. 정작 그의 집이 있는 정류장에서 내리기가 한없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다 보니 거기서 내리면 남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만 꽂히는 듯해서 잔뜩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늘 세 정류장을 지나쳐 내려 다시 되돌아 걷곤 하는 것이다. 허기진 배는 어서 집으로 뛰어들어가 삼양라면 한 봉지를 끓여 허기를 채우자고 속삭였지만, 그놈의 알량한 자존심이 그의 발목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영석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싫어서 다음에는 꼭 지나치지 말고 내려야지 했다가도 내릴 때가 되면 마음속에서 종종걸음만 치는 것이었다.

땀은 줄줄 흘러내려 옷이 살갗에 들러붙으니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벗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20여 분을 걸어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어제 마을 사람들이 물난리 걱정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매일 한두 명씩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소문도 계속 귓가에 남아 웅웅거렸다.


옆집 평상에는 비쩍 마른 40대로 보이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뼈만 남고 살갗은 마지못해 붙어 있는 듯하며 구부정한 어깨는 잔뜩 솟구쳐 기괴한 형상이었는데,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눈빛만은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 공간을 압도했다. 영석은 그 눈길을 피하듯 황급히 판잣집 삽짝을 밀치고 들어갔다.

영석의 집은 방 하나와 부엌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좁은 공간이 전부였다. 마을에 하나뿐인 공동화장실을 써야 했고, 부엌이라고 할 것조차 없는 공간에는 낡은 석유곤로와 그릇 몇 개가 전부이고, 방안에는 전원을 켜고 한참을 기다려야 화면이 나오는 진공관 TV, 지퍼 달린 천 옷장, 세발 달린 양은 밥상 등이 살림의 전부였다.

영석은 곧장 석유곤로에 불을 붙였다. 역겨운 석유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의 눈은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속을 뚫어질 듯 보고 있었다. 주황빛 삼양라면 봉지를 뜯어 냄비 속에 면과 수프를 털어 넣었다. 라면이 익는 시간이 몇 해는 걸린 것 같았다. 냉장고가 없다보니 누나가 이틀 전에 담은 열무김치는 벌써 시큼하게 익어버렸다. 달걀 하나만 넣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호사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서너 젓가락질만에 라면 한 개를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땀내 나는 몸을 씻고 싶었지만 수도비를 아껴야 한다는 누나 말이 생각났다. 배는 겨우 채웠으나, 가난한 청춘의 피로는 그보다 더 깊은 허기를 남기고 있었는지 졸음이 쏟아졌다.

"어이 학생, 나 좀 보세" 영석은 깜짝 놀랐다.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들이다 보니 프라이버시는 꿈꿀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인지 옆집 아저씨가 부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