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달, 성찰의 시간

_15년 만에 다시 꺼낸 원고

by 축성여석

<침묵의 달, 성찰의 시간> (2010년 12월 21일 작성)

침묵의 달에 적어둔 기록.

15년 전 연말에 적어두었던 이 글을 다시 꺼내 읽는다.

완성하지 못한 소설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 있고, 그 시절의 다짐 하나는 시간 속에서 조용히 지켜졌다.

이 글은 단 한 글자도 고치지 않는다.

다만, 서체의 크기만 키워, <총명기, 출판편집 40년의 기록> 연재 한가운데에 다시 놓아본다.

1989년 그 만남의 기억이, 최명희 작가의 눈빛이, 오늘날에도 제 편집 여정의 불씨로 타오른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 이따금씩 말에서 내려 자기가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다시 말을 타고 달린다고 한다.

그 까닭은 자신이 너무 빨리 달려 자기의 영혼이 미처 뒤쫓아 오지 못했을까봐 자기의 영혼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는 일종의 의식 행위라고...

지나온 세월의 자취를 돌아보는 것은기억의 회귀나 반성의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침묵의 달에는 말을 최대한 아끼고 성찰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2010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새 년을 맞이하면서 가다듬었던 마음의 다짐들...

쓰다가 중단한 3권 분량의 장편소설을 무슨 일이 있어도 탈고하리라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새벽에 깨어나 서재 책상 앞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원고지를 보았다.

400자 전용 원고지에 연필로 쓰다가 중단하고 7개월 정도가 훌쩍 지났다.

그간 200장 정도를 썼다가 쫙쫙 찢어버렸고, 그 후로 50여 장을 썼다가 또 찢어버리고이날까지 농땡이를 피우고 있다.


쓰지 못하는 시간..., 그 시간의 고통에 대해서는 작가들만이 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밀려왔다. 담배를 안 피우지 1년하고도 한 달이 지났다.

입술을 깨물고 벼루에 먹을 갈았다.

'왜 하고많은 직업 중에 글쓰기를 업으로 택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오면서 수백 번도 더했던 생각이다. 붓을 들어 종이에 힘껏 썼다.


노력이 재능이다.

인내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왜 이런 글귀를 쓴 것일까?

게으른 나 자신을 위로함과 동시에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문득 눈빛이 아주 강렬했던 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최명희...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빛에 아프게 심장이 찔려 책장에 꽂혀있는 <혼불>을 꺼내 기억이 나는 부분들을 펼쳤다.

후기에 쓰여 있는 글에서 나도 같은 아픔을 느낀다.


******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아 놓은 자료만을

어지럽게 쌓아둔 채,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는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 한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


아, 최명희!

그녀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한평생 독신으로 <혼불> 집필에만 매달렸고, 그것을 완성해 놓고 더는 고뇌하지 않아도 될 나라로 훌쩍 떠났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그녀의 이 말이 절절하게 가슴을 휘감는다.그러나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에 써야 한다. 최명희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1989년 3월 어느 날, 나는 아주 특별한 세 사람을 만났다.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 그리고 최명희 소설가였다. 그때 나는 한국문화원연합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잡지 <우리 문화>를 편집하고 있었다.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종로구 청진동에 있었는데,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시인통신과 멀지 않았다.

그때 해남문화원장은 향토사학자 황도훈 선생이었는데, 고향 사람이라서 특별한 정을 느끼고 있었다.

상경하여 문화원연합회에 들른 황 원장께서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그 시절 종로 청진동 골목은 깊었다. 끊어지는가 하다가 다시 이어지고, 숨는 듯하다가 다시 나타나며...

사연 많은 음식점들이 골목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밤이면 시인통신과 피맛골 열차집 등에 문화예술인들이 들끓었다. 황 원장이 안내한 곳은 깊은 골목에 숨어 있는 한정식집이었다.

그 집 방에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 그리고 최명희 소설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 원장이 나를 세 사람에게 인사시켰다. 김남주 시인을 처음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 무렵 김남주 시인은 문단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오랜 옥살이를 하면서 우유 곽에 못으로 긁어 쓴 시가 노래가 되었던...

그런데 첫인상은 참으로 순박하게 보였다. 검은 뿔테안경 속의 눈은 순하고도 따뜻했다.

"해남 물감자를 이렇게 만나니 반갑네."

김남주 시인은 방그레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초면이지만 고향 사람이라서 친근감을 느꼈다.고정희 시인도 해남 사람이다.

고정희 시인과 최명희 소설가... 독신인 두 여인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도사처럼 검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를 마셨는데, 최명희 작가가 물었다.

“왜 해남 사람한테 물감자라고 하나요?”

황 원장이 대답했다.

해남 사람을 가리켜 '해남 물감자'니 '해남 풋나락'이란 표현이 있다.

물감자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재래종 물고구마를 가리킨다. 파근파근한 밤고구마 일색인 요즘 고구마와 달리 물감자는 꿀맛처럼 달고 물렁물렁한 게 쪽 짜면 홍시처럼 쪼르륵 흘렀는데, 겨울철 점심 대용으로 그만이었다. '물감자'나 '풋나락'은 무르다, 덜 익었다는 놀림말로 통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해남 인심이 드세지 않고 순박하다는 뜻도 된다.


저녁을 먹고 술자리를 옮겼다. 문화예술인들이 어울려 술잔을 나누고 노래를 부르는 주점이었다.

다른 자리의 누군가가 김남주 시인에게 노래를 청했다. 잠시 주저하다가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남인수의 다소 퇴영적인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그 뒤를 이어 고정희 시인이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불렀다.

나는 최명희 소설가 옆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는 형편이 굉장히 안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을 쓰기 위해 교직을 그만 두고 창작에 몰두했던 무서운 여자 최명희!

아파트 사람들에게 이상한 여자 취급까지 받을 정도로 극빈자의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치열하게 작품을 썼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영혼을 불태우는 일과 같다.

글쓰기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 여인...,

최명희를 추억하며 내 마음을 새롭게 다진다.


오늘 깨어있지 않으면 내일은 얼마나 치사하게 절망할 것인가!


— 2010년 12월 21일에 쓴 기록을, 2025년의 겨울에 다시 꺼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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