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투고 원고 앞에서 길을 잃는다

_매끈한 문장과 식은 밥 사이에서

by 축성여석

나는 지금 투고 원고 앞에서 길을 잃는다

요즘 투고 원고를 읽다 보면, 너무 술술 읽혀서 오히려 손이 멈추는 순간이 잦다. 오탈자는 거의 없고, 문단은 정돈되어 있으며, 글쓴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단번에 파악된다. 예전 같으면 공을 들였다고 생각했을 글들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원고를 읽을수록 마음 한쪽이 자꾸만 불편해진다. 잘 읽히는데, 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고개는 끄덕여지지만, 생각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마주할 때마다 글쓰기의 본질이 흔들리는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낀다. 이유는 문장이 서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문장이 너무 요령 있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불길함에 가깝다. 이 글은 어디선가 너무 쉽게 만들어져 이 자리에 도착한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친절한 AI가 인간의 사유를 마비시키는 방식

생성형 AI의 정리력은 솔직히 말해 놀랍다. 사람이 몇 시간을 고민해야 할 내용을 순식간에 배열하고, 논리를 세우고, 읽기 좋은 문장으로 포장한다. 오탈자는 거의 없고, 어조는 중립적이며, 말투는 지나치게 친절하다.

문제는 바로 그 친절함이다. 문장이 지나치게 매끄럽다 보니, 사실과 해석의 경계가 쉽게 흐려진다. 독자는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정리된 결론을 받아 들게 되고,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의심할 틈조차 갖지 못한다. 인간이 사유를 멈추는 순간, 기계는 그 자리를 대신한다. 편리함은 늘 사고를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AI 느낌, 그리고 메타 느낌의 글이 풍기는 공통의 냄새

내가 말하는 AI 느낌, ‘메타 느낌의 글’이란, 삶을 건너오지 않고 설명부터 시작하는 글이다. 글쓴이는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지 않고, 이미 한발 물러난 자리에서 자기 글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관점이 먼저 나오고, 체험은 뒤따라온다. 결론은 늘 준비되어 있고, 문장은 그 결론을 향해 질서 정연하게 이동한다.

이런 글에는 실패가 없다. 망설임도 없고, 지워낸 흔적도 없다. 모든 문장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만, 정작 사람의 체온은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최근 마주한 어떤 원고는 완벽했다. ‘상실을 극복하는 다섯 가지 단계’라는 소제목 아래, 심리학적 용어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고, 문장은 물 흐르듯 유려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내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글은 상실을 겪어낸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상실에 대해 씌어진 백과사전을 요약본으로 전달받은 기분이었다. 정보는 있었으나 정서는 없었고, 문장은 있었으나 인간은 없었다.

그 매끈한 종이에 손을 베인 듯한 불쾌감을 느끼며, 나는 20여년 전 어느 무명작가가 보내온 낡은 원고 뭉치를 떠올렸다. 그의 문장은 서툴기 짝이 없었다. 주어와 서술어는 자주 어긋났고,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문장 곳곳이 울컥거리며 비어져 나왔다. 맞춤법조차 제멋대로였던 그 글의 한 구절이 여전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밤, 나는 밥솥에 남은 식은 밥을 보며 비로소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다.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밥을 안치지 않아도 된다는 지독한 쓸모없음이었다.”

세련된 수식어 하나 없었지만, 나는 그 투박한 문장 앞에서 며칠간 잠을 설쳤다. 그것은 삶을 통과해 나온 사람만이 길어 올릴 수 있는, 비릿하고도 뜨거운 체온이었다. AI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식은 밥’에 담긴 그 지독한 삶의 냄새. 내가 투고 원고에서 간절히 찾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결핍의 흔적이다.


왜 나는 이 글들 앞에서 화가 나는가

지난 금요일만 해도 세 사람의 투고 원고를 읽었다. 근래에 출판사로 들어오는 원고는 약속이나 한 듯이 “이 글은 너무 쉽게 왔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쉬움이 나를 가장 불안하게, 화나게 만든다.

이 화는 구시대의 고집도, 기술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다. 내가 평생 문장이라는 돌밭을 일구며 지켜온 ‘노동의 신성함’이 모욕당했다는 편집자적 자존심이다. 그 글들이 내가 평생 몸으로 배워온 한 가지 질서를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글에는 반드시 시간이 들고, 사람은 그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는 질서 말이다.

40년째 출판사라는 전쟁터에서 문장과 씨름하며 배운 것은 단 하나다.

나는 출판사라는 이름의 대학교에서 40년째 공부해 온 학인(學人)이다. 그동안 수많은 원고를 읽고, 고치고, 버리고, 살렸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은 단순하다. 쉽게 나온 문장은 대개 오래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편집자는 작가가 문장 사이사이에 흘린 땀과 눈물을 수습하는 사람이지, 기계가 뽑아낸 매끄러운 결과물을 포장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여전히 문장의 산고(産苦)를 함께 겪는 동료이고 싶다.


산고 없는 창작은 가능한가

창작은 언제나 산고에 가깝다. 쓰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잃어가며 쓴다. 확신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스스로에 대한 환상일 수도 있다. 문장이 태어나기까지의 그 고통은 결코 생략할 수 있는 절차가 아니다. 그런데 AI 느낌, 메타 느낌의 글은 이 모든 과정을 건너뛴 것처럼 보인다. 마치 아프지 않게 결과만 달라는 요구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지점에서 편집자로서 화가 난다. 고통이 빠진 문장은 자기 말에 머무를 뿐이다. 끝까지 데려갈 체력이 없다.


기계가 똑똑해질수록 인간은 더 생각해야 한다

머지않아 AI의 능력은 지금보다 수백 배, 어쩌면 천배 만 배쯤 향상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기계가 아주 다루기 쉬운 존재가 될 것이다. 애완동물처럼 편리하고, 순하고, 말 잘 듣는 존재로. 나는 그런 세계가 그리 반갑지 않다. 그래서 나는 투고 원고의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 숨겨진 ‘지체(遲滯)의 흔적’을 찾는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야 하고, 편집자는 그 방황이 끝날 때까지 독촉하며 기다려주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문장이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통과했는지를 끝까지 묻는 편집자의 역할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글이 안 나올 때, 쉬어 가는 윤리

나는 일요일에 연재하기로 약속을 정한 이 연재의 12회째를 쉬어간 적이 있다. 글이 안 풀렸고, 괜히 피곤했고, 그래서 솔직하게 “미안하지만, 쉬어 간다”라는 요지를 간단하게 적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결정은 부끄럽지 않다. 글이 나오지 않을 때 억지로 내놓지 않는 것도 창작자의 윤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 원고들을 읽으며 나는 다시 그 윤리를 떠올린다. 글은 적어도 쓰는 사람에게만큼은 쉽지 않아야 한다. 쉽게 나온 문장이 독자에게까지 쉬워질 거라는 착각은, 대개 틀린다.


글은 적어도 쓰는 사람에게만큼은 쉬워선 안 된다

나는 여전히 이렇게 믿는다. 문장은 고통의 대가다. 산고를 통과하지 않은 글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글이다. 아무리 매끈해 보여도, 아무리 빠르게 만들어졌어도, 그 문장은 결국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다. 기계가 쓴 문장은 인간의 체온이 닿는 자리까지는 가지 못한다.

앞으로 AI는 더 똑똑해질 것이다. 그럴수록 글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더 느리고, 더 고집스러워야 한다. 이 글은 기계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내가 평생 지켜온 문장 앞의 예의에 관한 기록이다. 나는 앞으로도 더 느리게 읽고, 더 집요하게 문장의 배후를 캘 것이다. 쉽게 태어난 문장들이 나를 길 잃게 만들지라도, 그 막막한 원고 더미 속에서 누군가의 '식은 밥' 같은 진실을 찾아내는 일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원고를 읽다 말고, 종종 창밖을 바라본다. 그 문장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잃고 왔는지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느끼려고.


눈밭의 사진.jpg

2026년 1월 11일, 이 글을 쓴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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