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벌나게, 한 단어의 고향

_넓은 땅에서 자란 말, 넓은 가슴으로 건네는 감탄

by 축성여석

허벌나게 크다, 허벌나게 좋다.

전라도 사람들 입에서 “허벌나게”만큼 자주, 또 힘줘서 튀어나오는 말도 드물 것이오.

무언가가 엄청 크거나, 엄청 많거나, 엄청 좋거나... 심지어는 속 뒤집어지게 나쁠 때도 우리는 망설임 없이 “허벌나게”를 앞에 붙이소.


“허벌나게 크다!”

“허벌나게 맛있다!”

“허벌나게 비싸다!”

“허벌나게 속상하다!”


한마디로 세상 모든 ‘극단’을 다 담아내는 전라도식 만능 부사라 잉.

표준어로는 “엄청나게”, “굉장히”, “터무니없이”쯤 되겠지만,

아이고- 그 말들엔 ‘허벌나게’가 가진 그 특유의 시원시원한 기운이 눈곱만큼도 안 들어가요.

허벌나게는 그냥 크다는 뜻이 아니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벅차오르는 느낌,

그 자체라.


가만히 그 소리를 뜯어보니깐 이유가 다 있소.


“허-” 하고 단전에서부터 숨을 길게 뱉으며 시작해서,

“벌-” 하며 입을 양옆으로 쫙 벌리고,

“나게”로 마무리할 때쯤엔 이미 가슴 속 체증이 뻥 뚫리는 것이지라.


국어학자들은 이걸 ‘강조 부사’니 ‘과장 표현’이니 하며 복잡하게 설명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소.

옛날 해남 들판이 어디 보통 넓었소? 논은 끝도 없이 펼쳐지고,

바다는 막힌 데 없이 시원스럽게 트이고,

가을 하늘은 또 허벌나게 높았소.

그 광활한 풍경 속에서 사람 목소리 하나가 먹혀 들어가지 않으려면,

소리를 허벌나게 뻥뻥 뱉어내야 했을 거요.


“야아, 저기 배 타고 오는 거 보이냐?”

“허벌나게 멀구먼!”

“올해 벼는 어째?”

“허벌나게 잘 됐다!”


그 넓은 공간에 맞춰 소리를 키우다 보니, 마음도 커지고 감탄도 허벌나게 커진 게 아니것소?

그러니 허벌나게는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넓은 땅에서 자란 사람들의 너른 가슴이 맨든 소리요.


오래전 해남 장날, 내 눈앞에서 펼쳐진 풍경 하나가 지금도 선하오.

어느 할아부지 한 분이 서울 올라간 아들 주려고 쌀 한 가마를 도라꾸(트럭)에 싣고 오셨일 기라.

마침 내려온 아들을 보자마자 할아부지가 쌀가마를 탁탁 치며 자랑을 허시더이다.

“야아, 올해는 쌀이 허벌나게 잘 됐다당께. 참말로 신간이 편하다 잉.”

근디 서울 물 좀 먹은 아들은 쌀가마를 보더니 영 딴소리를 해요.

“아부지, 요즘은 쌀이 남아돌아서 값이 폭락했대요. 이거 팔아봐야 돈도 안 된당께라 잉.”

그 소리에 할아부지가 허허 웃으며 대답허시더이다.

“이놈아, 값이야 으짰든지, 니 에미가 허벌나게 정성 들여 지은 쌀인디, 그걸 네가 서울 가서 허벌나게 맛있게 묵어주는 게 제일 아니겄냐!”

장터에 있던 사람들이 그 소리에 다 같이 웃었소.

나도 그 자리에서 가슴이 허벌나게 뜨거워졌지라. 아, 허벌나게는 물건의 크기를 재는 자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를 재는 그릇이었구나 싶었소.


그러니 길손들아, 오늘도 삶이 허벌나게 팍팍하고 힘들면 속으로 한 번 크게 외쳐보이소.

“허벌나게 괜찮을 기다!”

그 소리 한 번 시원하게 뱉고 나면, 진짜로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가 허벌나게 씻겨 내려갈 거요.

아따, 요 사랑방에 들어앉아 얘기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겄네.

그라제, 오늘도 잘 오셨소. 허벌나게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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