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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 Apr 14. 2022

여론과 군중

우리는 공중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사회가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대중들은 신문을 통해 급속한 정보의 전달을 경험하였다. 신문과 저널리즘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시간과 공간과 사회에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통합적이고 일반적인 정보와 시사를 제공하였다.

여론은 저널리즘이 제공한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물리적으로 떨어진 개개의 시민들이 가진 생각과 판단들을 일시적으로 집합시킨 것이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개개인이 서로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생각과 판단, 그리고 여론을 공유하며 시사에 대한 집합 정신을 형성하는 것이 공중이다.

군중은 들어봤어도 공중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이 집단체를 형성하여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인 군중과 유사하면서도 특정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 비로소 탄생한 근대적 군중이다.

공중을 이해하기 위해선 군중심리에 대한 사회적 현상과 사실들에 대해 이해하고 이것을 공중과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군중은 물리적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집합체로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 나는 같은 경험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여 동질감을 형성한다. 인간은 홀로 떨어져 개인적 상태일 때와 다른 사람들과 모여 군중을 이루었을 때 극명하게 다른 양상으로 행동한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보다 모여있을 때 더욱 폭력적이고 반윤리적이며 무식하고 비이성적이다. 가장 교양 있고 교육받은 사람들조차 군중의 파도에 휩쓸리면 그들과 똑같은 지리멸렬한 인물로 변할 수 있다. 가장 명확한 거짓말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야만성이 드러나고, 실제로 린치나 폭력을 가하는 행동력까지 나타난다. 물론 군중이 범죄를 저지르는 군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축제에 모인 관객들도 군중이고, 정치인의 연설을 듣고 있는 청자들도 군중이고, 교수의 강의를 듣는 것도 군중이다. 군중의 형태는 각기 다르지만 이들은 홀로 있을 때와는 다른 집단적 일체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군중 심리학의 탄생 배경을 볼 때 군중의 성질은 범죄와 친수성을 가진다. 군중은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환호하기보다는 증오하고 비난하는 데 이끌리기 더 쉽다. 동시에 개인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유치하고 변덕스럽다.

'뤼도빅 알레비 씨는 말한다.: 죄수들 중에는 상당히 예쁜 젊은 여자가 있었는데 손이 등 뒤로 묶여있었다. 군중은 "대령 마누라!"라고 외쳤다. 그 여자는 머리를 세우고는 그 아우성에 멸시하는 미소로 답했다.

그러자 모두 크게 외쳤다. "죽여라 죽여라" 그러자 한 노인이 큰소리로 말했다. "잔인한 행위는 하지 맙시다. 상대는 여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곧 군중의 분노는 그 노인 쪽으로 다시 향했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들은 파리코뮌 가담자들이었다. 그는 위태로웠는데,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파리에서 온 한 아이의 우스꽝스럽고 명랑한 목소리였다. "그 사람을 헤치지 마세요 그 여자는 그 사람 것이에요" 그러자 갑자기 노인 주위에서 큰 웃음이 터졌다. 그는 살아났다. 군중은 거의 동시에 아주 심각할 정도의 분노에서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즐거운 마음으로 변했다.

이 관찰에서 처음과 끝 모두를 주목해야 한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는 이 아름다운 여장부를 그들 각자가 개별적으로 보았다면 그녀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여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에게 분노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자존심이 그 용감한 도전에 상처를 입은 것만 느꼈던 것 같다.'

군중은 서로 살이 맞닿는 공간에서 서로의 행동을 반복적으로 모방한다. 일종의 집단 최면상태에 빠지고 일반적인 상황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확산될 수 있다. 개인의식은 흐려지고 집단의식이 뚜렷해진다. 하물며 마지못해 군중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도 행동을 같이하다 보면 미약하게나마 군중의 감정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자신을 볼 수 있다. 군중은 선을 행하는 것보다 악을 행하는 빈도가 더 많다.

이것을 군중심리라고 부른다. 반면에, 인쇄술의 발달로 정보전달과 통신기술이 발전하고 시민의식의 성장하면서 저널리즘이 시민들의 눈과 귀를 장악하게 되자 사회 전반은 직접 같은 장소와 시간대에 모여 군중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상과 이념, 같은 생각을 여론으로 표출하는 공중의 영향력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공중은 물리적으로 접촉하진 않더라도 인간의 모방심리가 그대로 나타나면서도 군중과는 구별되는 특징들을 보인다. 군중은 물리적 힘을 행사하지만 공중은 지성적 힘을 행사한다. 군중은 반대자에 물리적 충돌을 동반하지만 공중은 토론의 형태를 나타낸다. 군중은 그들이 모인 공간 내에서 영향력을 갖지만 공중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영향력을 가지며 국가 중대사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군중은 눈에 직관적으로 보이지만 공중은 사회의 일면을 면밀히 관찰하지 않으면 눈에 나타나지 않는다. 군중은 지도자를 동반하지만 공중은 지도자가 없다.

공중은 시각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은밀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공중의 범죄는 군중의 범죄보다 더욱 치밀하고 사악하다.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군중 지도자들의 거짓말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해로움에 대해선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한 저널리스트가 기업의 뇌물을 받고 오염 폐수 유출 사고를 은폐하려고 한다면 사회적 악영향을 방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중의 발생과 발전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저널리즘이다. 저널리즘은 공중에게 일반적인 지식과 정보, 시사를 전달하기 때문에 공중이 형성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공중은 저널리즘의 종속되어있다. 신문사의 저널리스트는 신문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 그 영향력이 수십 수백만의 독자들에게 끼친다면 저널리스트의 권력은 한낱 정치인에 비할 바가 못된다.

가끔씩 공중의 여론이 지나치게 과열되고 저널리스트가 공중의 여론과 반대되는 신문을 쓴다면 오히려 저널리스트에 반발하면서 그의 의견을 강제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저널리스트는 일시적으로 반발에 물러나면서 기사를 수정할 수 있지만 본래 그들의 기호를 만들어내는 것은 저널리스트다. 저널리스트는 공중의 기호에 맞는 기사를 내고 그 기사는 저널리스트 한 개인의 의도로 쓰인다. 한 마디로 유력한 저널리스트는 공중을 제맘대로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신문은 한 국가 내에 같은 공간과 시간대에 가장 적절한 시사성을 포함한다. 시민들은 신문에서 전달받은 정보를 토대로 일상적인 대화와 의견 교류를 한다. 이것이 차츰 모여 공중과 여론을 형성한다. 여론이라는 거대한 의식적 흐름은 바로 아주 작은 대화라는 샘물에서 그것이 하나둘씩 모이면서 시작된 거대한 하류인 것이다.

공중이 만들어낸 바로 이 여론. 여론이 그 사회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그러나 여론은 사회적인 정신의 다른 두 부분과 혼동해선 안된다. 그것은 바로 전통과 이성이다. 가장 바람직한 진행은 이성이 여론을 토대로 전통을 대체하는 것이지만 실제는 여론이 전통 또는 이성을 공격하여 그것을 해체하는 경우라든가 이성이 여론을 토대로 전통에 대체되는 경우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통, 이성, 여론은 이처럼 상호작용한다.

군중과 공중, 그리고 여론에 대해서 많은 논의점들이 있었다. 나는 현대사회의 경우에서 이것을 범죄적 영역에서 현대 사회에 적용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현대 정보사회에서는 한 저널리스트에 의해 공중이 좌지우지되는 신문의 영향력이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반면에 sns나 커뮤니티들을 통해 공중들의 직접적인 형태가 가시화되고 점차 신문사들과 쌍방향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 이제 저널리즘은 과거와 같이 막강한 일방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의 낡은 시대 배경적 한계 때문에 이 책에 더 이상 가치를 매기는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현대 정보사회에선 인터넷을 통해서 공중과 공중의 경게를 그을 수 없이 서로 융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집단체가 형성되고 있다. 군중처럼 군중심리에 영향을 받고 한없이 폭력적인 공중. 한 마디로 군중화된 공중이 탄생한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공중은 군중과 다르게 항시 감춰져 있는 반면에 군중은 물리적인 접촉을 통해 모여있어서 그들의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현대사회 인터넷의 익명성은 새로운 군중을 형성하였으니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범죄가 만들어지고 있다. 책임도 물을 수 없고, 심각성도 인지할 수 없으며 해악이 인터넷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범죄 말이다.

인터넷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사이버 린치는 어떤 죄책감도 없이 이루어진다. 어떤 커뮤니티 내부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증오의 대화는 모방에 모방을 거쳐서 사람들의 도덕성을 무감각하게 하고 정신을 증오로 가득 채워 정신 자체가 그것과 일치시키게 만든다.

공중에서 통용되는 논리적인 대화라는 것은 군중심리에 지배당한 폭도들의 사이버 불링으로 대체되었다. 상대를 설득하고 자신이 논리적으로 옳음을 증명하는 것은 과거의 일이다. 이제 인터넷에서 효과적인 대화는 단순히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고 입을 닥치게 할 만큼 무수한 숫자로 비난을 퍼붙는다든가 상대가 하지 않은 없는 말을 지어내서 시비를 건다든가 하는 등 대화의 성질이 군중의 경우처럼 폭력적 성질을 띄게 되었다.

한 가지 특별히 예를 들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젠 피해자의 입장에 선 사람도 언더도그마를 이용해서 폭력적인 대화법을 사용하고 있다.

여성주의나 다문화주의 pc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버릇이란 게 '혐오주의자'인데, 이 말은 본래라면 자신에게 혐오적 행동을 취하는 사람에게 '혐오를 하지 말라는 방어적인 차원에서' 상대를 혐오주의자로 지칭하는 것이다. 정말로 혐오표현 때문에 자신의 인권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상대를 '혐오주의자'라고 말하면서 혐오를 멈추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이 혐오주의자라는 표현의 사용례를 보건대 실제로 상대가 혐오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짜고짜 혐오주의자라면서 이 말을 '선제적', '공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나를 반대하는 상대는 혐오주의자로 몰아가면서 부정적인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은 폭력적인 대화법이다.

현재 인터넷 사회에 있는 실제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는 약자들은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언더도그마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폭도 군중들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피해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커뮤니티에서 모방된 언더도그마에 피해망상을 느끼게 될 수 있다.

참고로 여성주의나 pc주의를 에로 지칭했다고 해서 남초 커뮤니티는 이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남초도 똑같은 언더도그마를 피해망상으로 반복 모방하고 있다.

사견인데 인터넷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인터넷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다른 글로 쓸 생각.

특징적인 것은 커뮤니티가 대중화되고 사람들이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면서 오랫동안 이 모방행위를 반복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티즌들은 커뮤니티를 벗어나 현실에서 일상생활을 할 때에도 인터넷에서 학습한 군중 상태를 항시 유지한다.

군중의 범죄에 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사람들은 학교폭력과 같이 순전히 군중심리에 휩쓸린 비행청소년들에겐 냉혹한 엄벌을 요구한다. 이 책과 관계없이 전부터 해왔던 생각이지만 자아가 완전히 형성되지 못한 청소년들은 군중심리에 가장 취약한 개체들이다. 이들은 성인 개인 범죄자들의 범죄 성향과 다르고 분위기에 휩쓸리기 쉽기 때문에 누군가를 죽이거나 평생에 남을 상처를 입히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유치함과 익살스러움을 동반한 인간의 본성적인 면모가 표출된 것이다. 이들이 그만큼 미성숙하기 때문에 그만큼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범죄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사회가 미처 돌봐주지 못한 사회의 소산물이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범죄의 근본적인 원인은 항상 사회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비행청소년들을 양지로 올릴 시도조차 안 하면서 엄벌주의만 외치는 것은 대책은 아닌 것이다.

이 글에서 군중과 공중을 범죄적 차원에서만 평론하였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것들이 행하는 선의 행위도 분명히 있다. 이슬람의 민주화 혁명은 sns로 파급 확산되었고, 사회에 쉽사리 호소하지 못했던 억울하고도 불합리한 일들을 sns에 폭로하면서 정의를 실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빈도보다 악을 행하는 빈도가 더 많다. 인터넷은 악을 효과적으로 행하기 쉬운 최적의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즐기면서 무분별하게 행하는 공중 범죄들을 자기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가치를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가면 갈수록 날로 심각해지는 사회 갈등의 원인을 새로운 시각에서 인식하기 위해선 군중화된 공중들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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