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 감정의 역설

편안함이라는 마취제

by 학연서

이솝 우화에 나오는 ‘해와 바람’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위해 바람과 해가 시합을 벌이죠. 바람이 거센 돌풍을 일으킬수록 나그네는 옷깃을 더 단단히 여밉니다. 하지만 해가 따뜻한 햇살을 비추자, 더위를 느낀 나그네는 스스로 외투를 벗습니다.


이 우화를 ‘감정’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거센 바람은 부정 감정과 같고, 따뜻한 햇살은 긍정 감정과 같습니다.


흔히들 부정 감정은 문제 삼지만, 긍정 감정은 좋은 것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내면의 작동 원리를 들여다보면, 긍정 감정 역시 언제나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따뜻한 햇살이 나그네를 무장 해제시켰듯, 긍정 감정은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 현실을 점검하지 않게 만드는 마취제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너무 편안하고 좋으면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관계를 객관적으로 보는 대신 이 따뜻함이 영원할 것처럼 믿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곧 하나의 ‘기대’로 굳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판단력은 흐려지고, 문제는 미뤄지며,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요구하는 ‘청구서’가 쌓이기 시작합니다.



민지의 결혼: 사랑이었을까, 기대였을까?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민지는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녀에게 결혼은 일종의 ‘탈출구’였습니다. 그때 만난 성호는 민지에게 무척 잘해주었고, 민지는 그에게서 그토록 원하던 따뜻함과 안정감을 느꼈습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면 앞으로 행복할 거야.’


이 벅찬 기대감(긍정 감정) 속에서 민지는 성호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현실은 달랐습니다. 성호는 민지에게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역할을 기대했고, 연애 시절과는 다른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민지는 당황했습니다. 결혼 전 성호에게 느꼈던 그 따뜻한 긍정 감정은 산산이 부서졌고, 그 자리를 실망, 좌절, 분노 같은 부정 감정이 채웠습니다.



‘초기의 긍정 감정’이 부정 감정의 뿌리가 될 때


이 상황에서 민지가 느낀 분노와 좌절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뿌리에 남편을 향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친정의 억압에서 나를 구해줄 구원자’

‘내 결핍과 욕망을 채워줄 사람’


민지는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내면에서는 자신의 욕망과 결핍을 채워줄 존재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기대를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두 사람의 기대는 '은밀한 욕심'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 기대가 충족될 때는 달콤한 안정감으로 느껴지지만, 무너지는 순간 감정은 복수하듯 고통스러운 형태로 되돌아옵니다.


만약 이 구조를 자각하지 못한 채 관계가 끝나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똑같은 기대, 똑같은 환상, 그리고 똑같은 실망과 분노가 반복될 것입니다. 배우만 바뀐 채, 대본은 그대로인 삶이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성격’이 아니라 ‘기원’입니다


그렇다면 긍정 감정은 모두 위험한 것일까요? 기뻐해서도, 행복해해서도 안 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겉모습(성격)이 아니라,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기원’입니다.


모든 긍정 감정이 부정 감정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핍에서 비롯된 긍정 감정은 ‘네가 나를 채워줘서 기뻐’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이 감정은 상대가 채워주지 않는 순간, 실망과 분노로 변질됩니다.


반면, 존중 위에서 생긴 긍정 감정은 다릅니다. ‘내가 선택했고’, ‘내가 감당할 수 있고’, ‘너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라는 토대 위에서 생긴 보람과 뿌듯함은 상황이 변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즉, 긍정 감정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결핍 위에 세워진 긍정 감정이 때때로 문제를 일으킵니다.



결핍 기반 긍정 감정도 존중을 만나면 변질되지 않습니다


결핍 위에서 생긴 긍정 감정이라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존중의 토대’ 위로 옮겨 심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외로워서, 안정을 원해서 이 사람을 선택했구나.’라고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상대가 나와 함께 길을 가는 동반자임을 인정하면 그 감정은 독이 되어 돌아오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구원해줘야 해’라는 기대가 아니라, ‘함께 조율하며 가겠다’는 의지는 보람 있고 뿌듯한 감정들이 자라게 합니다.



감정 성찰의 기준: 이 감정은 나를 깨우는가, 마비시키는가


존중 위에서 생긴 긍정 감정은 나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깨어 있게 합니다. 질문을 멈추게 하지 않고, 관계를 성장시킵니다. 반대로 결핍 위에서 생긴 긍정 감정은 나를 편안하게 만들지만, 성찰을 마비시키고 그 대가를 나중에 치르게 합니다. 그래서 긍정 감정을 이렇게 구분해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감정은 내 노력에 따른 결과인가?

아니면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을 주는가?’


성숙한 삶과 관계란, 편안함을 느끼는 중에도 질문을 던지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놓지 않는 한, 긍정 감정은 더 이상 마취제가 아니라 현실을 따뜻하게 해주는 온기가 될 것입니다.


출처: 2권 86~89p / 저자 학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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