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이라는 이름의 가면

비존중의 아픔 1편

by 학연서

이번에 출간한 책을 집필하며 고심했던 지점 중 하나는 ‘가지치기’였습니다. 주제의 핵심에서 멀어지지 않으려면, 그 줄기에서 뻗어 나온 사유의 조각들을 덜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조각은 ‘긍정 감정의 역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관계의 위기가 부정적인 감정에서 시작된다고 믿지만, 사실 '긍정 감정'에서 시작되어 서서히 병들어가는 관계도 많습니다. 존중이라는 단단한 뿌리 없이 자라난 설렘과 기대는, 우리를 안심시켜 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마취제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존중이 부재한 관계가 이 달콤한 마취제에 취해 시작될 때, 그 끝은 어떤 단계를 거쳐 고통스러운 결말을 맞게 되는가. 책에 다 담지 못했던, 그러나 어쩌면 우리 삶에 가장 절실할지도 모를 그 연대기를 ‘무존중의 아픔’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하려 합니다.




1편 설렘이라는 이름의 가면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환상

우리는 처음 만난 타인에게 본능적으로 예의를 지키게 됩니다. 상대를 잘 모른다는 조심스러움, 실수하면 관계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그리고 잘 보이고 싶다는 욕구는 사람을 어느 때보다 정중한 존재로 만듭니다.


이 시기의 상대는 나에게 ‘가능성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현실보다 가능성이 더 크기에, 단점은 흐릿하게 보이고 장점이 더 크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 괜찮은 사람 같다'는 느낌 이면에는 '이 사람이 앞으로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숨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내 사랑은 '당신'인가? '기대'인가?

첫 만남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마음이 통했던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은 것 같은 안도감. ‘이 사람이라면 나를 이해해 줄 것 같다’는 벅찬 설렘. 이 따뜻한 감정 속에서 관계는 싹을 틔웁니다.


하지만 그때 느낀 두근거리는 설렘이, 사실은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저 사람이 채워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한 끌림이라면 어떨까요.


외로움이 큰 사람은 상대의 다정함에, 불안함이 많은 사람은 상대의 듬직함에,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상대의 능력에 매료되곤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 또한 상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대 위에 섭니다.


'나도 너에게 좋은 사람이 될게'라는 무언의 약속과 함께 말이죠.



기대의 쌍방 연출

이땐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그에 맞춰 나의 장점을 부각합니다. 반면 초라한 단점은 감춥니다. 이것은 속임수가 아닙니다. 소중한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부터 관계는 취약해지기 시작합니다. '나의 결핍이 만든 기대'와 '상대의 결핍이 만든 기대'가 서로의 진짜 모습이 아닌, 잘 꾸며진 가면을 붙잡고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상대 역시 같은 이유로 내게 매료되었다면, 이 관계는 ‘내가 그토록 받고 싶었던 특정한 느낌’ 혹은 ‘나의 부족함을 메워줄 이미지’와 연애에 빠진 것에 가깝습니다.



인정 결핍이 만든 '가치'의 착각

어릴 적부터 성취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아무리 잘해도 부모님은 무덤덤했어’라는 허기를 안고 자랐습니다. 그러다 대학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칭찬하고 지지해 주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과 있으면 비로소 내가 가치 있게 느껴져. 나를 제대로 알아봐 주는 유일한 사람이야.’


남자가 그녀를 좋아하는 동기가 내면의 인정 결핍을 메우기 위함이라면, 그의 호감은 상대의 ‘존재’보다는, 자신의 공허함을 채워줄 ‘도구적 역할’에 매료된 것에 가깝습니다.




불안이 선택한 ‘안정’이라는 대피소

부모의 잦은 다툼 속에서 자란 한 여자가 있습니다. 집안엔 큰소리가 자주 오갔고 부모의 얼굴은 차가웠습니다. 성인이 된 그녀는 감정이 잔잔하고 자신을 잘 다독여주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그녀는 내면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그에게 ‘설렘’을 느끼며, 세심하고 다정한 남자에게 급격히 빠져들었습니다. 이때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가 주는 정서적 안정감과 일시적인 평온함에 가깝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은 약속: '묵시적 채무'

이 시점에서 관계에는 아주 조용한 빚이 생깁니다. 계약서를 쓴 적도, 말로 약속한 적도 없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의무가 생겨버린 것이죠. 마치 '묵시적 채무'와도 같습니다.


“너는 내가 필요할 때 나를 다정하게 위로해 줘야 해.”

“너는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줘야 해.”


문제는 이것이 '혼자만의 계약'이라는 점입니다.


이 관계의 가장 큰 함정은 상대를 온전한 한 사람으로 존중하기보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줄 역할자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해주는 역할.

나를 안정시켜 주는 역할.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



감정과 고통

이 단계에서는 '고통'보다는 '환각'에 가까운 황홀경을 경험합니다. 좋아서 들뜹니다. 가슴이 설레고 감동해서 눈물이 납니다. 인정받았다는 안도감에 힘이 솟습니다. 따뜻한 온기에 무장 해제되어 평온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감정의 이면에는 기대라는 이름의 은밀한 욕심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기대가 커질수록 ‘이것이 사라지면 어떡하지?’라는 막연한 불안도 함께 싹틉니다. 그래서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은 앞으로 다가올 고통의 씨앗을 심는 시기인 셈입니다.


이때 자신의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 그 원인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진짜 나 자신을 만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씌워놓은 역할극의 가면을 벗김으로써 다음 단계의 늪으로 빠지는 경로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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