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가 현실을 삼킬 때

비존중의 아픔 2편

by 학연서

앞서 '설렘'이라는 달콤한 마취제에 취해 관계를 시작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취 기운이 가시지 않은 초기 관계에서 우리는 상대라는 원석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모양으로 깎아 만든 보석을 봅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환상의 시나리오'가 어떻게 현실의 존재를 지워버리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현실이 아닌 '상상의 기대 시나리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가까운 관계가 되면, 상대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시나리오를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힘들다고 했을 때 바로 전화해 줬어. → 역시 나를 아끼는 게 분명해.'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줬어. → 참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야.'


이런 긍정적인 경험이 몇 번 쌓이면 머릿속에 '암묵적 시나리오'가 완성됩니다.


'이 사람은 내가 힘들 때마다 이렇게 해줄 거야.'


단순한 예상이 기대로 굳어지고, 그 기대는 어느덧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처럼 느껴집니다. 이때부터 나는 눈앞에 있는 '실제 상대'가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이상적으로 빚어낸 가상의 캐릭터와 교류하곤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필터, '선택적 지각'

사람은 언제까지고 좋은 모습만 연기할 수 없습니다. 관계가 안정권에 접어들었다는 확신이 들면 긴장의 끈은 늦춰지고, 본래의 성격과 습관, 감춰둔 약점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큰 함정은 보고 싶은 것만 크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건 포장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만든 시나리오에 맞춰 상대의 현실적인 모습을 내 입맛대로 편집해 버리는 것이죠.


상대가 무심해서 말을 안 하는 건데 ➡ 진중하고 속이 깊어서 그래.

상대가 습관적으로 늦는 건데 ➡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느라 바쁘겠어.

상대가 가끔 툭툭 내뱉는 까칠함도 ➡ 워낙 솔직하고 꾸밈없는 성격이라 그래.


이건 내 결핍이 만든 기대가 현실을 덮어버린 결과입니다. 과거의 좋았던 기억 한 조각을 붙들고 ‘이 사람은 본래 좋은 사람이야’라는 서사를 유지하려는 고집입니다.



시나리오가 깨진 자리, 자책하지 마세요

내게 상대는 좋은 사람이기에,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상대 탓을 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공격하곤 합니다.


'내가 너무 앞서갔나?'

'나 때문에 관계가 망가지면 어쩌지.'


내심 공들여 세운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아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책할수록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너져가는 시나리오를 보수하기 위해 자신을 더 거세게 몰아붙입니다.


‘내가 매력이 떨어졌나?’

‘내가 부족한가? 더 잘하면 저 사람이 예전처럼 다정해질까?’


이 자기 비난은 아주 위험합니다. 상대를 붙잡기 위해 나다움을 숨기고, 더 완벽한 역할을 연기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답지 못하게 되면 될수록 관계는 점점 더 늪으로 빠져듭니다. 이는 나를 잃어가며 관계를 지키려는 자기부정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과 고통

현실의 연인보다는 머릿속 ‘그림’에 기대합니다. 실재하는 연인이 아니라 ‘내가 만든 기대의 환영’과 연애 중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불안합니다. 환상이 깨질까 봐 두렵고, 기대가 어긋날 때마다 실망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나에게 돌리며 자책하고 괴로워합니다. 이 고통은 나 혼자 시나리오를 쓰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다 다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존중을 회복하면 이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존중은 나와 상대를 실제 하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내가 만든 시나리오를 찢어버릴 용기가 없다면, 앞으로도 본 모습을 마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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