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 5

K와의 이별과 미국으로의 유학

by 오마르 왕자

밀레니엄을 군대에서 보내는 동안 지구의 종말은 일어나지 않았고 2001년 2월 14일 오전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 부대의 뒤편 PX가 있는 후문을 동기인 N과 함께 나섰다. 12월에 입대한 이유가 제대 후 바로 복학하기 위함이었으므로 난 2주 뒤 대학원생 2학년으로 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다. 내가 군대에 다녀오는 동안 졸업 전이었던 후배들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같은 연구실에 속하게 되어 이제는 후배들과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게 되었다. 물론 대학원 입학 동기들은 학년이 높아져 박사과정에 진학하였고 여전히 반가운 얼굴로 날 맞아주었다. 학교에 다니다 보니 대학원에 진학한 학부동기들 중 나보다 1년 먼저 군대를 다녀온 친구들이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길래 나도 호기심이 일어 친구들과 같이 덩달아 영어공부에 동참하였다. 당시 친구들 중 한 명이 열심히 하던 학습이 CNN뉴스 받아 적기였다. 스크립트에 점선으로 비어있는 부분들을 뉴스를 반복해 들으면서 채우는 훈련이었는데 당시는 토익이 활성화되기 전이어서 훗날 이 공부가 내가 치를 TOEFL시험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K는 비록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한동안 편지를 보내질 않았지만 2000년 말에 군대에 인터넷이 보급되어 이메일이 활성화되었울 때 난 K에게 내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메일 회신을 통해 그녀와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만큼 뜨겁게 서로를 응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로에게 이별을 고백한 사이도 아니고 인턴이었던 K도 바쁜 탓에 남자를 사귄다거나 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가끔 만나서 시간을 보낼 정도는 되는 사이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2001년 겨울이 다가올 무렵 나도 친구들을 따라 미국 대학원에 박사과정으로 지원하는 서류를 준비하면서 K와의 이별이 정말 현실로 다가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10군데를 지원하면서 어디 한 군데는 연락이 올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렇게 되면 최소 5년 동안은 K를 못 볼 텐데 나를 기다려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회사에 취직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K가 개원을 해 가정을 꾸려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선택을 마다하고 난 그러나 손에 붙잡히지도 않을 여왕의 그림자를 쫓아서 도전하는 삶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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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석사도 졸업논문을 준비해야 했고 논문자격시험도 치러야 했다. 사실 이 논문자격시험은 박사도 똑같이 치르는 시험이라 석사를 받는 입장에서 놓고 보면 매우 억울한 감이 있는 제도였는데 석사를 받기 위해서는 TEPS라는 새로운 시험도 쳐야 해서 유학준비와 동시에 석사졸업도 준비하는 것이 빠듯한 일정이었다. 사실 유학을 준비하면서 가장 뼈아프게 다가웠던 것은 내 졸업학점이었다. 과학고를 졸업한 올림피아드 출신 동기들은 처음부터 유학이란 선택지를 졸업 이후의 중요한 진로로 목표를 하고 있었기에 고등학교 학생처럼 성실하게 수업을 받고 학점을 관리하였고 방학 동안에는 수학 올림피아드 학생들을 지도하는 알바도 하면서 교수님들과 인맥도 쌓는 노력을 했다. 또한 대한 수학회에서 주관하는 대학생 수학경시대회에 응시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을 자신의 장점으로 어필하여 자기소개서를 채울 만큼 유학을 위한 준비가 철저하였다. 그러나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목표인 인생과 먼 미래의 직업적 준비까지 내다보면서 삶을 준비하는 인생이 가져오는 그 차이만큼 이 내 성적표에는 새겨져 있었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계획하는 인생의 길이만큼 그리고 얼마나 길게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달라진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평소에는 미국소식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유학을 결정할 즈음에는 대학원 연구실에서 공부하다가 저녁 늦게 학교 총장잔디를 지나올 무렵 현지시각 미국에서 911이 터졌다는 방송을 듣고는 깜짝 놀라 미국에 전쟁이 나는 건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웠던 기억이 난다. 전쟁은 없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자살테러가 밝혀지고 외국인 유학생의 비자발급을 제한한다는 횡횡한 소식도 들려왔지만 난생처음 대사관 인터뷰를 하고 비자가 찍힌 여권을 손에 쥔 3월 무렵에는 조금씩 미국에 간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유학을 가는 곳에 대한 정보도 공유하는 게시판에 가서 그해 같이 가게 된 합격생들과 만나서 서로 인사도 나누고 그곳에 있는 89학번 선배에게 연락도 해서 형이 마중도 나오겠다는 이메일 회신도 받고 나서는 이제 정말 이민가방에 짐을 잔뜩 싣고 미국에 가기만 하면 되었다. 박재정의 '헤어지자 말해요' 노랫말 가사처럼 K에게 이별을 고하러 가는 길은 햇볕 눈이 부신 날이었고 그래서일까 마지막으로 본 K의 멋쩍은 미소와 악수를 지금도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도 뚜렷하게 안녕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잘 지내라고 인사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후로 이제 2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비오던 날 수목원으로 가는 버스에서 K가 내 어깨에 기대었던 그 순간도 한장의 사진으로만 머릿속에 남겨져 있다. 누군가 남자의 가슴에는 항상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한 장소가 있다고 했듯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지하철 플랫폼에서 혹 K와 비슷한 외모의 여인이 스쳐 지나갈 때는 본능처럼 뒤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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