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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그레이 Jun 05. 2024

석양(夕陽)을 바라보며

욘 포세의 소설「아침 그리고 저녁」을 읽고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라진다고 하는데 요즘은 일주일이 하루 같다. 나이를 더 먹으면 하루가 한 시간 같을까? 욘 포세의 소설「아침 그리고 저녁」은 인생을 하루로 보고 주인공이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100세 시대’라고 하니 그때쯤이면 인생이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지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주인공은 딸 하나만 낳고 더 이상 아이가 생기지 않던 집안에 선물처럼 주어진 아들로 태어났다. 어촌의 풍족하지 않은 집안이지만 부모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랐을 것이 짐작된다.

    결혼하고 금슬 좋은 아내와 칠 남매를 낳아 다 출가시키고 말년에는 연금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아내가 잠을 자다가 죽고, 나중에 주인공도 역시 잠을 자다가 죽는다.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 일곱 명의 자녀를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을 거라는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죽음을 잠자듯이 맞이한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복이다.

    잠자다가 편하게 가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아닌가?


    나도 오 남매의 맏이로 첫째 아들이 유산된 후 태어난 딸이기 때문에 어릴 때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렇게 축복 속에 태어난 내가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살다가 어느새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엄마가 오랜 병을 앓다가 쉰 살도 안 되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같은 해에 환갑도 안 되는 나이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무의식중에 엄마보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쉰 살이 지난 어느 날 문득 내가 엄마가 돌아가신 나이보다 더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내심 놀란 적이 있다. 그러다가 환갑이 지나면서는 인생을 한 바퀴 돌았다는 생각에 이제부터는 덤이라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도 죽을 때가 되면 편안하게 죽지 못하고 병으로 고생하다 죽을 거라는 두려움이 늘 있었다. 아마 엄마의 오랜 투병 때문에 무의식에 그런 두려움이 심어진 것 같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내 자의식이 강해졌기 때문인지, 그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사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말년에 병석에 누워 고생하다 가시는 분도 많지만 드물기는 해도 건강하게 살다가 주변 정리도 깔끔하게 하고 잠자듯 돌아가시는 분도 있지 않는가, 어차피 피하지 못할 죽음이고 어떻게 죽을지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미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미리 걱정하지 말고 그냥 그 때 상황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게 대처하는 게 현명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자 두려움이 사라지고 좀 편하게 죽음을 바라보게 되었다.


     죽음에 관해 생각할 때는 건강에 이상이 있거나 심적으로 힘들 때다. 이럴 때는 어떻게 이 땅에서의 삶을 마무리할까 궁리하게 되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남겨질 가족이고, 그 다음이 아쉬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화해하는 것, 그리고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사람들에게 고마웠던 것은 고맙다고 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가지고 있는 짐을 정리하기도 하고, 유언장을 쓰기도 하고, 입관 체험도 해 보곤 했었다.

    요즘은 죽고 나서 자신이 잊히는 게 아쉬워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려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는 것 같고 심지어는 다시 살아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죽은 몸을 냉동시키기도 하고 유전자를 복제하기도 하고 영상이나 녹음이나 기록으로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내 흔적을 지우고 가는 편이 남은 가족들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물건을 늘리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물건은 재활용하거나 나눠주거나 폐기하면서 조금씩 짐을 정리하고 있다. 오래 써 온 일기를 정리하는 일이 남아있긴 해도 웬만한 물건들은 제 자리를 찾아 놓인 걸 보면 마음이 가볍고 흡족하다.


    주인공이 죽던 날은 평범한 일상 중의 하루 저녁에 일어나는 일로 묘사되어 있다. 평소와 같이 아침에 일어나 담배를 피우고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늘 하던 대로 하루를 시작한다. 다를 게 없는 일상인데 주인공은 뭔가 다르다는 걸 느낀다. 그러면서 친구를 만나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도 하고, 젊었을 때 사귀고 싶어했던 여자도 만나고, 아내도 만나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이미 죽은 사람들인데도 알아채지를 못한다.

    그러다가 막내딸이 자신을 못 알아보고 자기 몸을 통과하여 지나치는 것을 보면서 차츰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주인공을 데리러 온 친구와 함께 다른 세상으로 가는 배를 타고 떠난다.

    다른 세상은 어떠냐는 주인공의 질문에 친구는 “그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이름도 없고 위험하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너와 나의 구분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으며,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환하게 빛이 나는 곳인데, 사랑하는 건 거기 다 있다”고 말해준다.

    그 길을 떠나면서 주인공은 몸을 돌려 저 멀리 뒤편, 저 아래 멀리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과정이 이렇다면 크게 두려워할 것도 없다. 사실 나는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일종의 “유체 이탈”인데, 오래 전 어느 날 새벽에 깨어 기도를 하고 다시 잠깐 선잠이 들었는데 내가 천정 쪽 공중에 붕 떠서 바닥에 누워있는 내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때 공중에 떠 있는 나는 아무 감정도 아무 느낌도 없이 그냥 조용히 내 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경험 이후로 나는 죽음이란 이렇게 내 영이 내 몸과 분리되는 것인데, 떠나는 내 영은 이미 이 땅에서의 희로애락은 전혀 느끼지 않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가족들에게 죽은 나는 아무 감정도 없이 떠나니 내가 죽더라도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주인공처럼 어쩌면 떠나기 전에 얼마동안은 자기 몸이 죽은 걸 깨닫지 못하고 이곳에서의 삶을 떠올리는 경험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죽은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과는 상관없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묻으면주인공의 막내딸은 생각한다. ‘아버지는 독특한 분이셨고 유별난 구석이 있었지만 자애롭고 선한 분이었고, 그리고 쉽지 않은 인생을 사셨다’고.

    이 땅에서의 삶은 단순히 물건이나 관계만 남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통해 자식에게 전해지는 무형의 유산이 있다.

    내 자식은 나를 떠나보낼 때 어떤 기억을 떠올릴까?

    남은 삶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시간으로 채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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