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체험의 가치에 대해

간접 경험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시대에서 다시금 생각해 보는 가치

by 포롱이

대다수의 것을 가상으로,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직접 체험이 가지는 밀도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험을 머릿속에 내재화한다는 것은 결국 뇌 속의 특정 구조가 변형되는 일이다.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던 리소스가 재배치되고, 기억이라는 정보의 형태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말이 온전히 성립한다면, 다른 예시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라는 행위는 애초에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이 안에 있는데, 굳이 리소스를 조작하고, 정리하고, 코드를 짜는 수고를 할 이유가 없다.


이 질문은 더 멀리 나아가 생명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지구에는 모든 조건과 가능성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는데, 왜 그 많은 변형과 시행착오 끝에 굳이 ‘생명’이라는 형태가 탄생해야 했을까.

여기쯤 오면, “모든 것이 이미 있다”는 말 자체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의 가능성은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싹 틔우고, 어떻게 가공하고, 어떤 형태로 변형해 내느냐가 현실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다.


변형은 쉽지 않다.

그래서 숭고하다.

요즘 점점 활용률이 높아지고 있는 생성형 AI 등이 대단한 이유도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지식들을 조합하고 변형하는 능력을 상당 수준 구현해 냈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가장 큰 자극을, 가장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정돈되지 않은, 최대 해상도의 자극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추출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가공해 내는 과정이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그 방식은 다소 비효율적이고 가성비가 떨어져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가장 유효한 방법이다.

모든 것들이 전혀 열화 되지 않은 경험을 통해 나만의 힘으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고, 그렇게 얻게 된 것이야말로 자신의 내면에서 그 해상도만큼 반짝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판타지나 시대물 등 직접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들은 간접 체험이 최선이어서, 그것이 최대 해상도의 경험일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직접 체험이 가능하다면, 그 밀도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직접 체험이든 간접 체험이든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접했느냐가 아니라,

그 경험을 어떤 밀도로 내면에 통과시켰고 어떤 형태로 변형해냈느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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