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감

by Young

오랜만에 결혼식에 다녀왔다.


몇 년 전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인연을 맺은 후배의 결혼식이었다. 우리는 일 년에 한 번, 연말에 만나는 사이였다. 내 기준에서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사이라면 충분히 친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결혼식장은 신랑과 신부의 친구들로 북적였다. 특히 신랑 쪽 친구들이 많았다. 큰 회사에 다니고, 취미생활을 꾸준히 이어온 결과일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특별히 더 친한 사람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나의 친밀함을 드러낼 수 있는 어떤 그룹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혼자만 친한 사람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나는 결혼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축하는 그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친하다는 말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어려서부터 친구가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반장이 여는 생일파티에 초대받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늘 선택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 생일은 방학이었고, 친구를 초대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친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가 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믿었다. 더 매력적으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도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은 두 명뿐이다.

그놈과 저놈. 중학교 때부터 이어진 관계이고, 그 둘과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도 또렷이 기억난다. 친구라기보다는 인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참 신기하게 만들어진 관계다. 여전히 나는 이 둘과 친구다. 이 둘을 제외하고 친구라고 자신 있게 부를 사람은 없다. 나머지는 모두 ‘친한 사람들’이다. 어제의 결혼식 또한 그런 관계였다. 친구는 아니었지만, 친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자리였다.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누군가와 친하다는 느낌을 깨닫기 위해서 서로의 마음이 맞아야 한다.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다. 친구와 친한 사람들을 구분 짓는 잣대도 매우 개인적이고 편견적이다. 두 가지 모두 내가 친밀함을 드러내고 형성된 친밀감의 정도의 차이로 설명된다. 구분은 그야말로 내가 정한 범위를 정의하는 방법일 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친밀한 관계는 종종 나 혼자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는 특히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에는 많은 사람을 친구라 불렀지만, 지금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연스럽게 친구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드는 것이라 이해해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나이가 들수록 친밀감을 나누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린 시절 친구가 적었던 이유를, 그때의 나는 선택받지 못한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친밀함을 내가 사야 한다고 믿었다. 누구나 친해지고 싶어 하는 강렬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비록 ‘친구’라는 편견적 단어로 부르기에는 망설여지는 관계들이지만, 친한 사람들은 분명히 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상태가 좋다.


어릴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때는 선택되기를 기다렸지만 지금은 선택과 무관하게 내 친밀함을 먼저 드러낸다는 점이다. 물론 그 친밀함의 표현이 항상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혹은 반대로, 친밀함의 표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내가 드러낸 친밀함으로 부끄러움과 후회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선택한 태도다.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원하는 사람에게 친밀함을 드러낸다.


나는 나이 듦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고, 주변의 선배와 부모, 어르신들을 유심히 관찰해 왔다. 나이와 친밀감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는 없어 보였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새로운 친밀한 관계를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감정적으로 얽히는 관계, 자신을 깊이 드러내야 하는 관계를 점점 부담스러워한다. 일반적으로 확장하면 익숙한 일 외의 새로운 시도,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꺼린다고 이해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점점 자신의 세계를 줄여가는 일처럼 보였다.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생각과 세계가 넓어지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많은 어른들이 능력과 경험이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세계를 축소하고 있었다. 새로운 공부와 새로운 관계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어쩌면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아서 이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 모습에 대한 반감으로 내가 다르게 행동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꽤 복 받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이 듦과 함께 새로운 자극을 계속 만들어가고 있으니, 아직 성장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느낀다.


나는 정해진 대로 사는 것을 좋아한다. 지하철은 늘 같은 플랫폼에서, 비슷한 시간에 타고, 가능한 한 같은 자리에 앉는다. 가본 길만 가고, 먹던 것만 먹는다. 익숙한 글을 읽고, 선호하는 영화만 본다. 새로운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갇혀 있었다. 편견은 늘었고, 타인보다 내 결핍에 더 집중했다. 방어적이 되었고, 나를 숨기게 되었다. 다행히도 이 성향을 흔들어 놓는 일을 하고 있다. 일 자체는 여전히 혼자 고민하고 만들어내는 성격이 강하지만, 아주 작은 회사에서 적은 인원으로 일하다 보니 외부의 많은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업무적 친밀감 형성이 필요해졌다. 어제의 저녁 또한 그 연장선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업무적 행위가 아니라, 발전된 친밀감의 한 형태라고 느꼈다.


나는 마흔을 넘어 이제 어른으로 불린다.


나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사람이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길 욕구한다. 물론 여전히 내가 더 많이 말하는 편이지만, 조금씩 듣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듣는 연습을 하면서 내 세계가 점점 더 풍성해진다는 것도 느낀다.


이런 경험과 생각을 통해 친밀감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친밀함으로 내가 나를 드러내면, 친밀감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친밀감의 상태는 나의 친밀함을 드러낸 결과물이다. 친밀함을 드러낸다고 해서 내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친밀함은 나의 강함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런 정의로 미루어 내가 드러내는 친밀함은 진화해 왔다. 처음 의도적으로 친밀함을 표현했을 때, 나는 나의 우월함을 보여주려 애썼다. 어린 시절 반장의 생일에 가고 싶은 욕구의 연장선이다. ‘나와 친해지면 좋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작은 빈틈을 노렸다. 다름을 보이기 위해 애썼고 그 다름이 매력적임을 자신했다.


지금은 다르다. 물론 친밀감이란 상태가 완성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약간의 우월감 표현이 효과적인 순간도 있다. 다만 그것은 의도적으로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한다고 믿는다. 아마 그 기술이 조금씩 몸에 배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외롭게 태어났기에 사회를 이루었다고 한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또한 여럿 중에서 혼자를 선택했을 뿐, 단 하나만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름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이다.


나 역시 외로움이 있다. 그래서 친밀함을 이곳저곳에 표현한다. 친밀함을 표현하는 태도, 그 태도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우쭐대지 않는 것. 이것이 나이 듦에 좋은 자극이 된다고 믿는다.


친밀감은 익숙함에 대한 집착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시선을 바꾸면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세상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