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 (1)

by 모니카

작년 겨울, 오랜만에 나는 뜨개실을 샀다. 코로나 때문이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내 시간에 좀 더 활력을 넣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게 무작정 뜨개실과 바늘을 사 가지고 오면서 나는 문득 엄마를 떠올렸다.


어릴 적, 나는 산꼭대기 12평 집에 살았다. 여섯 명의 식구가 살기에는 굉장히 좁은 공간이었을 텐데 내 기억 속 그 집은 운동장만큼 넓었다. 그 집으로 이사하면서 엄마는 집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아서 좋다고 하셨다. 방 2개에 작은 거실, 화장실과 부엌이 갖춰진 있을 것만 딱 있는. 그런 집이었다. 일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많은 아버지 대신 막내인 내가 엄마와 방을 함께 쓰는 날이 많았다. 언니들이 쓰는 방이 더 넓었지만 엄마와 아빠가 주로 쓰는 방이었기에 우리는 그 방을 '안방'이라고 불렀다. 안방은 3평도 안 되는 작은 크기에 성인 2명이 누우면 꽉 차는 방이었다. 겨울이면 그곳에 엄마는 늘 두툼한 요와 솜이불을 아주 깔끔하게 깔아 두었다. 워낙 웃풍이 심해서 연탄보일러가 열 일을 해도 방 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방바닥의 열기라도 가둬두지 않으면 당장 추위를 녹일 만한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뜨끈뜨끈하게 유지된 방바닥의 온기는 우리 가족에게 없어서는 안 될 따뜻함이었다.


우리 집의 뜨거운 심장 같은 그 방, 그 자리를 변함없이 지켜낸 것은 엄마였다. 매년 겨울밤이면 엄마는 그 자리에 앉아 뜨개질을 했었다. 엄마는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잘했다. 어릴 적 사진을 찾아보면 엄마가 만들어주었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언니들과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바느질도 잘해서 티셔츠나 치마에 구멍이 나면 아름답게 자수를 놓아주기도 했다. 손재주가 좋은 엄마가 뜨개질로 만드는 것은 주로 가족의 조끼였다. 무채색 실로는 아빠의 조끼를, 산뜻한 색의 실로는 딸들의 것을 떴다. 때로는 아빠가 입었던 조끼를 풀어서 다시 딸 들의 조끼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실이 낡아 끊어지지 않는 이상 엄마의 실 재활용은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아빠의 것으로 시작된 조끼는 풀고 뜨기를 반복하면서 막내인 나까지 전달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엄마, 뜨개질 그만 하고 나하고 놀자."

"안 돼. 얼른 만들어야 추울 때 입지."


유독 엄마의 품을 좋아했던 나는 몇 날 며칠을 뜨개질만 하는 엄마를 졸랐다. 엄마가 지금 뜨고 있는 조끼는 내 것은 분명 아니었다. 색깔이 회색인 걸 보니 아버지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이미 조끼가 있었다. 얼른 만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빠, 조끼 있잖아. 지난번에도 실 풀어서 아빠 꺼 만든 거 아냐?"

"이건 큰언니 꺼."


이미 사춘기가 심각해진 큰언니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조끼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엄마가 정성껏 만들어 주어도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큰언니는 엄마의 조끼를 자신의 서랍에 처박아두기가 일쑤였다. 그러다 둘째 언니가 그 조끼를 입겠다고 나서면 고약한 성질을 부리곤 했다. 엄마도 우리들도 큰언니의 고약한 성질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런 큰언니의 조끼를, 좋아라 하지도 않는 큰언니의 조끼를 엄마가 힘들여 또다시 뜨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내 꺼나 만들어주지."

"있잖아."

"조끼가 짧아졌어. 엄마도 봤잖아. 내가 키가 커서."

"그 정도는 괜찮아. 내년에 떠 줄게."


키가 자란 나에게 작년 조끼가 작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키만 크고 살은 찌지 않아서 조끼를 입었을 때 엄청 작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심통난 얼굴로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뜨개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목 운동 삼아 고개를 한 바퀴 돌렸다. 양 쪽 손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한 자세로 오랜 시간 있다 보니 엄마의 근육도 여기저기 통증이 오는 것 같았다.


"엄마, 어깨 좀 주물러 줘."


엄마는 멈췄던 뜨개질을 다시 시작하며 나에게 말했다. 그즈음 엄마는 나에게 약국에 가서 진통제를 사 오라는 심부름을 정말 많이 시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진통제를 삼키는 엄마의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비싼 병원비에 병원 진료는 꿈도 꾸지 못하던 때였다. 건강관리라는 단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엄마들은 하루 종일 바지런히 움직였다. 우리 엄마 역시 하루 종일 정말 바쁘게 움직였다. 오전 9시에 미싱공장에 출근해서 6시까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밀렸던 집안 일과 저녁을 차려야 했다. 딸 들이 도와주긴 해도 엄마가 다시 해야 하는 일은 분명히 있었다. 그렇게 집안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나면 저녁 9시는 훌쩍 지나 있었다. 미싱 공장에서도 하루 종일 원단 먼지를 먹으며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일했을 텐데도 엄마는 뜨개질을 멈추지 않았다. 힘들면 그만 하라는 딸 들의 말에 늘 '괜찮다'고만했다. 힘든 내색 한 번 내지 않았다. 미싱공장에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부업이라도 해야겠다며 일을 받아오던 엄마였다. 내가 엄마처럼 살았더라면 나는 며칠 가지 못하고 병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루 24시간을 빠듯하게 쓰고도 엄마는 자기 전까지 뜨개질을 멈추지 않았다.


"엄마, 나도 뜨개질해볼래."


어깨를 주무르던 나는 결국 엄마의 뜨개바늘을 빼앗았다. 솔직히 엄마를 쉬게 하려고 바늘을 뺏은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는 엄마가 힘든지, 아픈지 알 수 없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엄마가 먹는 진통제가 병을 낫게 하는 약인 줄 알았다. 마냥 해맑은 나에게 엄마는 뜨개질하는 방법을 꼼꼼히 알려주었다. 바늘을 꿰는 방법, 실을 돌리는 방법, 다시 바늘을 빼내는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나는 엄마가 시킨 대로만 했다. 엄마는 내가 뜨개질을 하는 걸 보더니 '그대로만 해.'라고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가 무엇을 할까 궁금했는데, 결국 또 집안일이었다.


철이 없는 나는 엄마의 마음을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도 엄마가 뜨개질을 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그저 따뜻하고 좋았다. 남편과 자식이 따뜻한 겨울을 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코 한 코 정성을 들였을 엄마만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의 뜨개 조끼를 생각하면 그저 푸근하고 그저 따뜻했다.


하지만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다. 엄마가 뜨던 조끼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도 정성도 듬뿍 들어있지만 엄마의 끊임없는 희생이 더 많았다는 것을 말이다. 뜨개질을 하는 내 손 위로 엄마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갑작스레 콧등이 시큰해진다. 뜨개질을 시작하고 겨우 1시간, 어깨 근육이 이렇게 뭉치는데 엄마는 어땠을까? 피곤함을 이겨내며 조끼를 떠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조끼를 떠주면서 엄마는 행복했을까? 내가 답을 낼 수가 없다. 지금 뜨고 있는 목도리를 열심히 완성해서 엄마의 생신 선물로 드리고자 마음만 먹을 뿐이다.


"엄마, 엄마가 내 엄마여서 너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